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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7) 주교품을 받다

조선 선교지로 가는 꿈, 오랜 간청 끝에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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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5월 방콕에 있는 샴대목구 주교관에 레오 12세 교황(재위 1823~1829)이 서명한 3통의 소칙서(Brevis)가 도착했다. 하나는 샴대목구장인 플로랑 주교에게, 나머지는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온 소칙서였다. 1828년 2월 5일 레오 12세 교황이 서명한 칙서들이 그제야 수신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레오 12세 교황은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브뤼기에르 신부를 샴대목구의 부대목구장이자 카라드라의 명의 주교로 임명한다. 단 이 결정은 플로랑 주교가 선종했을 경우에 시행된다”고 했다. 반면, 플로랑 주교가 받은 레오 12세 교황의 소칙서에는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는 선교사 중 한 명을 선발하여 대목구장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로 임명하고 갑사의 명의주교로 성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받은 레오 12세 교황의 소칙서 내용은 플로랑 주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효력이 없었다. 하지만 플로랑 주교가 받은 레오 12세 교황은 소회칙은 효력을 내용 그대로 발휘했다. 플로랑 주교는 교황의 지시대로 선교사 중 자신의 후임자로 브뤼기에르 신부를 지명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몇 차례 이를 고사하다가 자신의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적극 지지해 주는 플로랑 주교의 뜻에 따라 주교직을 수락했다.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주교품을 주기 전인 1829년 6월 20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만일 필요하다면 가엾은 조선 사람들을 구원하러 가겠노라고 진심으로 자원하여 나섰다. 나는 그것이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그를 기꺼이 놓아주겠다. 이 말을 듣고 아마 몹시 놀라고 교구장과 그의 보좌 주교가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우리의 머리는 아직 성하다. … 포교성성에 한 것처럼 나도 여러분이 내세운 지혜롭고 현명한 이유를 찬성한다. 그러나 눈앞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 여러분이 내세우는 이유가 어느 정도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 나는 가엾은 조선 교우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들에게 참으로 사도적인 많은 선교사를 보내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한다.”

브뤼기에르는 갑사의 명의 주교로 샴대목구장의 승계권을 지닌 부대목구장으로 1829년 6월 29일 성 베드르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방콕에서 플로랑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았다. 이후 조선대목구에는 갑사의 명의 주교가 모두 3명이 배출됐다. 첫 번째가 브뤼기에르 주교이며, 두 번째는 앵베르 주교, 세 번째는 베르뇌 주교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사목 표어를 ‘가서 만백성을 가르쳐라’(Euntes Docete Omnes Gentes)로 정했다. 마태오복음 28장 18-19절의 내용을 함축한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발현하여 만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아울러 이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표어이기도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회 전통에 따라 문장도 만들었다. 그의 주교 문장은 주교가 교구를 순시할 때 쓰던 모자와 양옆으로 교구장을 상징하는 삼단 수술이 있고 그 안에 방패 모양의 문장이 있는 전통적 양식을 취했다. 목장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로서의 사목 책임을 표현했다. 그리고 방패 모양의 문장 한가운데에 빛나는 십자가를 새기고 그 왼편에는 ‘Ave Maria’의 첫머리 글자인 A와 M을 겹쳐 놓았고, 반대편에는 교회(또는 아시아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를 태운 범선)를 상징하는 배를 새겨놓았다. 방패 바탕의 줄은 바다를 상징하고, ME는 ‘Mission Etrangeres’(외방 전교)의 약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임을 드러냈다. 따라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문장은 “박해받고 있는 조선 선교지(또는 세상 풍파에 놓인 교회)를 성모님께 의탁한다”는 내용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예상했다. 조선으로 가다 중국에서 체포돼 죽을 수 있다는 것까지 계산했다. 그가 조선 선교를 자원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우려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알려진 길이 전혀 없다, 아무도 주교님과 동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무심한 듯 “불가능한 것을 시도해 봐야 한다, 길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건 두고 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장애와 난관을 피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를 자원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선 사람들이 우리가 채택할 수단들을 알려주고, 따라가야 할 길을 그려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곧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신의 자격으로 북경에 오는 사람들 외에는 나라 밖으로 결코 나가 본 적이 없어 자기 나라밖에 모르는 불쌍한 백성, 바다에 대한 공포심을 타고났고 자기가 사는 구역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여행할 줄 아는 백성은 그와 같은 지침들을 제공하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조선 사람들을 만나러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를 맞이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가서 그들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주교품을 받은 직후 페낭으로 떠났다. 교황청이 조선 선교를 허락하면 곧장 마카오로 가서 조선에 들어가기 위해 페낭신학교에서 대기할 셈이었다. 페낭은 샴대목구 관할이기도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에서 1829년 10월 1일과 1830년 1월 31일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 “조선으로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편지를 쓴 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2년을 훌쩍 넘긴 1832년 7월 초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장 움피에르스 신부로부터 짧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조선으로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떠나십시오. 주교님의 조선 입국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일 샴대목구장이 돌아가셨으면, 직무 대행을 임명하시고 가능한 한 빨리 가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명의 주교= 교황의 이름으로 사목하는 대목구장은 통상 ‘명의 주교’로 서품된다. 명의 주교는 교구장이 아닌 주교로 교황청에 근무하는 주교, 교황사절, 성직 자치구장, 대목구장, 보좌 주교, 퇴임 주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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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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