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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주일 - 21세기 교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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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보편 교회를 잘 이끌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교황 주일을 맞아 21세기 가톨릭 교회를 이끈 교황들을 소개한다.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한국을 방문한 인연이 있어서 한국 교회 신자들에게는 이런저런 추억이 많은 교황들이다.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2005년 4월 2일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성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무려 400만 명에 이르는 조문객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찾았다. 장례 미사 때는 수많은 인파가 교황을 즉시 시성해 달라는 구호(산토 수비토, Santo Subito)를 외쳤다. 교황은 교회 역사상 가장 빨리 선종 6년 만에 시복됐고, 2014년 성인품에 올랐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 교회에 얼마나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1920년 폴란드 바도바체에서 태어난 카롤 보이티와(요한 바오로 2세의 이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사제품을 받았다. 크라쿠프대와 루블린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학문 활동을 벌이던 보이티와 신부는 1958년 크라쿠프 보좌 주교, 1964년 크라쿠프대교구장(대주교)으로 임명된 데 이어 1967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면서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보이티와 추기경은 1971년 세계 주교 시노드 상임위원에 임명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된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선출된 지 33일 만에 갑자기 선종하면서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보이티와 추기경은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455년 만에 비이탈리아 출신이 교황직에 오른 것이다.

공산권 출신에 58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교황은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사목 활동을 펼쳤다. 1979년 중남미를 시작으로 2004년 프랑스 루르드에 이르기까지 재위 기간 중 104회에 걸쳐 130여 개 나라를 사목 방문하며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은 가르치는 직무에도 충실했다. 1979년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발표한 이래 2002년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헌과 강론, 연설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에 관한 원칙을 세우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사회적 가르침을 제시했다.

정교회 수장과의 대화, 로마 루터 교회와 유다인 회당 방문, 이슬람 사원 방문,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인 기도 모임 등은 친교와 대화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황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사랑과 자비, 비폭력을 호소한 교황은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국 폴란드를 찾아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면서 폴란드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 물꼬를 텄다.

교황은 또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회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92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 교회 재판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 데 이어 대희년인 2000년 ‘용서의 날’ 참회예식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 저항하지 못한 점, 십자군 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등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교황이었다.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순교자의 나라, 순교자의 땅”이라고 말하며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춰 한국 교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교황은 5년 뒤인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 다시 방한해 남북의 화해와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베네딕토 16세(2005∼2013)

1927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의 이름)는 1951년 사제품을 받고 1953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독일의 본(Bonn)대와 뮌스터대, 튀빙겐대 등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쳤다. 1968년 출간한 「그리스도교 신앙, 어제와 오늘」은 그에게 세계적인 신학자라는 명성을 안긴 역저다.

1969년 레겐스부르크대로 옮겨 부총장을 지낸 라칭거는 1977년 뮌헨대교구장과 추기경에, 그리고 1981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됐다.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은 ‘진리의 수호자’로서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상과 신학적 조류에 정면으로 맞섰다. 해방신학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2005년 4월 19일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 교황으로 선출됐다. 베네딕토 16세는 전임자의 유업을 단절 없이 이어나갔다. 4개 대륙을 사목 방문했고,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종교 간 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 평화와 사회 정의 문제에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교황은 무엇보다 교회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에 흔들리는 것을 막고자 애를 썼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주의와 맞섰다면 베네딕토 16세는 세속주의, 도덕적 상대주의와 맞서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황은 서구 세계가 세속화하면서 신앙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쇠퇴와 세속화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그리스도교의 기본 가치를 회복할 것을 역설했다. 교황이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이어진 ‘신앙의 해’를 선포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유럽으로 몰려드는 난민을 수용할 의무가 있다고 촉구했고, 2010년 바티칸은행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자체 금융 감독기구를 신설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 문제도 교황의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2010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터져 나온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문제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교황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추문 문제를 언급하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했다.

교황은 한반도 비핵화와 이산가족 문제에도 꾸준한 관심을 나타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접한 교황은 “한반도에서 남북 대화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러한 화해를 위한 노력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하리라는 희망을 낳고 있다”면서 한반도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 2009년 교황청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2월 11일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교황은 사임 발표문에서 “급변하는 세상,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몸과 마음의 힘’이 없다고 확신하고, ‘온전한 자유’로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살아 있으면서 교황직을 사임한 경우는 15세기 그레고리오 12세 교황 이후 598년 만의 일이다. 본인의 뜻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나 후임 교황이 선출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은 결단은 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교황은 현재 바티칸 경내의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다.





프란치스코(2013∼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교황이다.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다. 비유럽권으로는 1282년 만에 선출된 교황이자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교황이다.

1936년 남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골료(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름)는 1969년 사제품을 받고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 아르헨티나관구장을 지냈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2001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베르골료는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의 행보는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교황 선출 직후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기 전에 먼저 신자들의 기도를 요청했으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교황의 공식 관저인 교황궁 대신 교황청 방문객들이 머무는 마르타의 집을 숙소로 택했다. 교황이 되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이 된 후에도 그런 삶의 모습을 유지했다.

교황 선출 이후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수많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바다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람페두사 섬 난민수용소였다. 자신의 생일에는 노숙자들을 식사에 초대했고,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한 편에 그들을 위한 샤워시설을 마련했다.

교황은 교황청과 바티칸은행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될 것을 촉구했다. 또 평화의 사도로서 미국과 쿠바가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낙태와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기존 가르침을 고수하고 있다. 동성애의 경우, 죄로 보는 교회의 전통 가르침은 유지하면서도 동성애자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낙태는 ‘소름 끼치는 행동’이라고 비판했고, 교회 내 여성의 역할 확대를 요청하면서도 여성의 사제 서품은 불가하다는 교회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를 주제로 2014년 8월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교황은 신자는 물론 국민 모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집전을 위한 교황의 방한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 방한에 이은 세 번째 교황 방한이었다.

교황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세월호 참사 유족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아픔을 어루만졌고, 청년들에게는 주님을 믿고 세상으로 나가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기를 요청했다. 한국 주교들에게는 순교자들이 보여준 희망의 지킴이가 돼야 한다고 일깨웠다. 함박웃음으로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교황의 인간적이고 소탈한 행보는 우리 사회에 프란치스코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이 특별한 관심을 가진 주제 가운데 하나는 자비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비를 이웃에게 전하기를 희망한 교황은 2015년 12월부터 2016년 11월까지를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밖에도 가난한 이들, 가정, 세계 평화, 가정, 환경 등에 큰 관심을 갖고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함께 세상의 변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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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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