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한국 천주교회사 특별 기획전] (5) 5막. 바티칸과 조선 교회

박해의 피바람 뚫고 첫 조선인 사제 봉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784년 신앙 공동체를 설립했을 당시 조선에는 사제가 없었다. 성사의 은총을 바라던 조선 신자들은 수차례 북경교구로 밀사를 보내 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조선 신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처지를 알리고 사제를 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냈다. 그들의 간절함을 전할 수 있었던 방법은 오직 편지뿐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북경까지 한번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6개월이었다. 북경교구에 편지를 전하면 그 편지가 다시 마카오 교황청대표부를 거쳐 로마에 전달됐고, 답장을 받기까지는 족히 1, 2년이 걸렸다. 신앙생활을 위해 사제를 요청했던 간절함이 담긴 이 편지들은 조선의 신자 공동체가 보여준 노력의 흔적이자, 믿음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자생적 신앙 공동체에서 보편 교회의 일원이 됐다. 1845년에는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탄생한다.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지 61년 만의 경사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 이 편지에는 조선 교회 창립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 1811(신미)년에 조선 신자들이 비오 7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에서 조선 신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해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소식을 알리는 편지

북경교구장 구베아(A. de Gouvea, 1751~1808) 주교가 1790년 10월 6일 자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안토넬리(Leonardo Antonenelli, 1730~1811)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모두 6장으로 어떻게 조선에 교회가 세워졌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함께 박해의 상황도 전하고 있다. 이 편지는 초기 조선 신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제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그 편지가 북경 교회에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는지를 알려준다.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비오 7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

1811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쓴 편지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해 사제 파견을 청하고 있다. 박해로 각지에 흩어져 살던 신자들은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힘을 모아 북경 교회와 연락을 하고 사제 영입 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박해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혹여 발각됐을 때 교회 지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쓴 이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신자들”이라고만 적고 있다.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와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칙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대성당에서 두 개의 소칙서를 반포했다. 조선대목구 설정과 초대 대목구장 임명 소칙서다. 조선대목구 설정은 성직자를 보내 달라는 조선 신자들의 지속적이고 열성적인 청원과 브뤼기에르(B. Bruguire, 1792~1835) 주교가 헌신적인 태도로 조선 선교를 자원했기에 가능했다.

조선대목구 설정은 조선 교회뿐 아니라 아시아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대목구 설정을 시작으로 교황청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를 직접 관장함으로써, 선교를 앞세워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정책을 실행해 나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 선교를 순수한 복음 선포의 방향으로 확실하게 끌고 나갈 수 있게 됐다.

▲ 월전 장우성 화백 작 김대건 신부 성인화.



조선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성인화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는 조선인 첫 사제이다. 1836년 최방제(프란치스코, ?~1839), 최양업(토마스, 1821~1861)과 함께 조선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돼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ol, 1808~1853)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다 체포돼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됐다. 복음서를 들고 순교를 상징하는 빨마 가지를 들고 있는 김대건 신부의 성인화는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조선인 두 번째 신부로 2016년 가경자로 선포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 신부는 이 편지에서 외교인들 눈을 피해 밤에만 이동해 교우촌에 도착해서 한밤중에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고 동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하는 어려움을 적고 있다. 그리고 한글의 우수성도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교리 내용을 한글 가사체로 여러 편 저술해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익히도록 했다. 이를 ‘천주가사’라 한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7-08-16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17

지혜 11장 24절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