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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정요(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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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한 서정요 프란치스코(오른쪽).





4명의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

서정요는 1890년 1월 8일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풍수원(현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에서 태어났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풍수원으로 피신, 옹기를 구우며 살아온 집안의 3남 중 차남이었고, 1903년 동갑인 여규식(마리아)과 혼인했다. 숙부 서병익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의주본당 주임에 임명되자 부부가 함께 이사해 복사와 주방 일을 도왔다. 연이어 세 딸을 낳은 뒤 하느님께 아들을 주실 것을 기도했고, 이후로 아들만 넷을 더 낳았다. 이 중 둘을 사제로, 둘을 수녀로 봉헌했다.

1924년 서병익 신부가 13년간 의주본당 사목을 마치고 개성으로 옮기자 함께 개성으로 갔으나 1년 만에 신의주로 되돌아와 메리놀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을 도왔다. 평양 근처 서포에 새 교구청 건립 공사가 시작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서포로 이주, 1931년 신축이 마무리되기까지 공사현장 감독을 맡았다.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쉴 새 없이 일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새로 설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살림을 도왔고,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집안을 성가정으로 이끌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들이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을 정도다. 일제 말기 수녀원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서문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 주방에서 일하며 자녀들을 양육했다. 1944년 부인이 죽으면서 사위(셋째 서예석 카밀라의 남편)의 주선으로 양조장 일을 하며 그 사택으로 옮겨 세 아들과 지냈다.

1949년 12월 7일 관후리본당 보좌로 있던 맏아들 서운석 신부가 체포돼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50년 10월 8일 양조장에 파견돼 있던 정치보위부원들이 회사 일로 의논할 게 있다며 찾아와 함께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 같은 날 불려 나간 사람들이 모두 총살됐기에 서정요 또한 총살됐을 것으로 보인다.

서정요는

△1890년 1월 8일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풍수원 태생 △1911년 숙부 서병익 신부가 의주본당 주임에 임명되자 가족과 함께 의주로 이주 △1924년 서병익 신부와 함께 개성으로 이주 △1927년 평양으로 이주해 서포지목구청 신축 공사현장 감독 △1944년 사위의 양조장으로 이사 △1950년 10월 8일 정치보위부원들과 함께 나간 뒤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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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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