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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사목자를 찾아서] (6) 박정일 주교

“과감한 쇄신으로 그리스도 구원 전하는 착한 목자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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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미카엘, 92) 주교가 올해로 사제 수품 60주년을 맞았다. 주교품을 받은 지 41년째다.
 

▲ 박정일 주교는 “늘 선교하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여러 기록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3개 교구(제주ㆍ전주ㆍ마산) 교구장을 지낸 유일한 주교다. 또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단독 추진한 124위 시복시성 소송 책임을 졌던 주교다. 그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먼저 ‘피데이 도눔’(Fidei Doum, 사제가 부족한 지역에 교구 사제를 한시적으로 선교사로 파견하는 제도)을 도입해 실천한 주교다. 그리고 한국 교회 사도좌 정기방문 및 세계성체대회에 가장 많이 참석한 주교다.  
 

2015년 3월 사도좌 정기방문 때 교황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한 박 주교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은퇴한 주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교황은 크게 웃으면서 “겸손하신 분”이라 화답했다. 박 주교는 겸손하고 소탈하다. 늘 웃는 얼굴로 사제들과 신자들을 대한다. 직접 컴퓨터로 만든 기도 상본을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주면서 매일 기도할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때때로 그를 ‘무른 사람’으로 오해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결실을 볼 때까지 뚝심 있게 추진하는 ‘호시우행(虎視牛行, 눈은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행동은 소처럼 성실하게)’형 인물이다. 사제 수품 60주년을 맞은 박정일 주교를 4일 경남 창녕 나자렛 예수 수녀원에서 만났다.
 


 ▶사제품을 받은 지 올해로 60년이 됐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1958년 11월 23일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성구는 ‘나 주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2)이다. 주교회의가 펴낸 「성경」에는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로 돼 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제로 뽑아주신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편을 선택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부족한 제가 60년 동안 사제로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를 위해 기도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로마에서 유학했을 당시는 어땠는지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봄 당시 피란 온 신학생들이 부산 영도의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학장이 로마로 유학을 가라고 했다. 교황청이 전 세계 교회와 전교 지방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1623년 설립한 우르바노대학교에 입학해 철학 3년, 신학 4년 과정을 마치고 철학과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우르바노신학교는 규율이 매우 엄격했다. 울타리 속에 갇혀 사는 곳이었다. 모든 수업은 라틴어로 진행됐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수단을 입어야 했다. 방학 때도 집에 가지 못하고 신학교 별장에서 함께 기숙 생활을 해야 했다. 신문은 물론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다. 로마에서 10년을 살면서 한국에 전화 한 번 할 수 없었고, 동생이 보내온 편지 1통을 받아 보았을 뿐이었다.”



▶로마에서 신학뿐 아니라 사회학도 공부했다는데 이유가 있나
 

“우르바노신학교에선 철저한 복음 선포 의식을 배웠다. ‘한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는 표어를 늘 자랑스럽게 외치곤 했다. 성모 신심을 몸에 익혔다. 우르바노대를 졸업하고 운 좋게 장학금을 받고 그레고리오대학교와 안젤리쿰(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1년씩 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사제품을 받고 나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사제가 부족하니 빨리 귀국하라고 해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1962년 귀국했다.”

 

▶덕원신학교 출신으로 알고 있다
 

“나는 평남 평원군 출신이다. 1950년 12월 월남할 때까지 북한에 있었다. 1926년 12월생이니 24년을 북한에서 살았다. 평양교구 영유본당 출신으로 서울대교구 백민관 신부와 고향 동기다. 어머니 반대로 중학교 졸업 후 신학교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1945년부터 3년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당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앓자 어머니가 ‘신부가 되지 못해 병이 났다’며 신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그래서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1949년 5월 7일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됐다. 귀가 명령을 받고 평양교구청에 와 보니 교구장이던 홍용호 주교도 체포돼 행방불명 상태였다.”

 

▶귀국 후 부산교구로 입적했다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귀국할 때 유재국ㆍ장병룡 신부와 함께 부산교구에 입적했다. 당시에는 사제품을 받고 바로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평양교구 출신 셋은 부산교구에서 처음으로 1년 넘게 보좌 생활을 했다. 이후 1964년 문산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사목하고 있을 때 마산교구가 설정됐다. 문산 사목구가 마산교구로 편입되면서 마산교구 사제로 입적됐다. 이후 1970년부터 대건대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윤리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박정일 주교는 1977년 4월 15일 바오로 6세 교황에게 초대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5월 31일 제주 중앙성당에서 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 수품 성구는 ‘충성과 온유’(집회 45,4)였다. 박 주교는 제주교구장 착좌 후 “앞으로 제주교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이 두터운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사목 이념을 밝혔다. 그가 약속한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는 제주교구의 전통이 됐다. 박 주교는 5년간 제주교구장으로 사목하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박 주교는 전주교구장 시절이 가장 잊지 못할 시기라고 했다.



▶전주교구장 시절이 각별한 이유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과 1987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그중 가장 보람된 것은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피데이 도눔 선교사를 남미 페루에 파견한 일이었다. 한국 교회가 성숙한 교회답게 새로운 출발을 할 때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교구 사제들에게 보편 교회에 이바지하는 선교 활동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당시 정승현ㆍ방의성ㆍ김윤섭 신부가 피데이 도눔을 자원했다. 이들이 밀알이 돼 현재 서울, 대구, 수원, 대전, 원주, 춘천 등 많은 교구 사제들이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 천호성지와 치명자산 성지를 조성한 게 기억에 남는다.”

▲ 박정일 주교가 2004년 124위 시복 재판 교령에 서명하고 있다.


 

▶124위 시복시성 운동의 책임을 맡았다
 

“전주교구장으로 6년간 활동하다 1988년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03위 시성 이후 전주교구장으로 있을 때 초기 순교자 시복 청원을 준비했었다. 1999년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후 주교회의 산하에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주교들의 동의로 위원장이 됐다. 11년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마산교구장이었기에 교회법에 따라 마산교구장이 책임을 맡아 시복 대상자를 선발하고 시복예비심사 재판을 이끌었다. 지금도 시성 절차법에 따라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책임은 마산교구장이 지고 있다. 시복시성주교특위 위원장도 마산교구장의 위임을 받아 추진한다. 124위 복자가 한 명도 탈락하지 않고 2014년 모두 복자품에 올라 너무 기쁘다.”

 

▶나자렛 예수 수녀회와는 어떤 인연이 있나
 

“나자렛 예수 수녀회는 마산교구에서 처음으로 설립한 수도회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됐다. 홀몸노인과 매 맞는 여성,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수녀원은 지은 지 30년이 넘은 폐교를 수리해 쓰고 있다. 곳곳에 비가 새고 건물이 낡다 보니 수녀들이 병에 걸려 많이들 아프다. 요즘 나의 제일 큰 걱정이기도 하다.”

 

2002년 마산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박정일 주교는 “교회는 늘 선교해야 하고, 사회 속에 현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순교자의 영성과 순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정신 자세와 자기 쇄신의 태도, 시대의 표징과 사람들의 필요를 재빨리 파악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 주교는 한국 교회의 사제들에게 “내적으로 과감한 쇄신을 이뤄 겨레가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착한 목자가 돼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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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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