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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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의 구국 장정은 오늘도 계속된다

[광복 73주년 특집] 탄생 100주년 맞는 장준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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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왼쪽)씨가 이부영 민주당 상임고문 등 내빈들에게 애국과 애민, 통일에 바친 고인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돌베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그 제목으로 자서전을 쓴 장준하(루도비코, 1918∼1975)다.

그러나 그의 구국 장정(長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장준하의 발걸음은 ‘의문의 죽음’으로 멈췄지만 제2, 제3의 장준하가 살아 있는 한, 진정한 독립을 향한 장정은 끝난 게 아니다. 광복군에서의 항일 독립운동과 「사상계」를 통한 지식인 운동, 반독재ㆍ민주화ㆍ통일 운동에 바친 장준하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고자 4∼3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사)장준하기념사업회(회장 유광언) 주최로 ‘장준하 100년, 대한민국 100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서 ‘장준하100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장남 장호권(69)씨를 만나 장준하 선생의 삶과 행적을 들었다.



4일 서대문형무소 중앙사. ‘역사관’으로 개조된 옥사 복도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 100년 만의 폭염이 덮친 옥사는 한증막이 따로 없다. 복도 막다른 벽에 장준하의 대형 사진이 내걸리고 복도 양쪽에 고인의 친필 원고와 사진ㆍ문헌 기록, 유품, 영상물 등이 빼곡하다.

장호권 위원장은 불볕더위 속에서도 짙은 남색 정장에 꼿꼿하고 의연한 표정으로 내빈을 맞는다.

‘장준하 100년, 대한민국 100년’이라는 특별전 제목이 의미심장하다는 말에 그는 “장준하라는 개인, 곧 선친의 일이 아니라 역사의 일이기 때문”이라며 “27일 선친 생일잔치를 빌미로 국민을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문을 뗐다.

전시는 초라하다. 옥사 복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마지막 광복군에 대한 예우도 아니다.

그러나 “대륙의 수수밭에 누워 침 없이 마른 입으로 몇 번이나 되씹고, 또 눈 덩어리를 베개로 하고, 동사(凍死)의 갈림길에서 밤을 지새우며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던 광복군의 기억을 되살리기엔 부족함이 없다.

낡은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북 삭주 출신으로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그해 7월 7일 탈영한 뒤 2356㎞(6000리)를 걸어 쓰촨성 충칭의 광복군 휘하에 합류하기에 앞서 부인 김희숙(로사, 1926∼2018)씨에게 보낸 서한이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 9,3)

바오로 사도의 심경에 빗대 자신의 소회를 전하는 대목이 감동적이다.

그렇게 장준하 선생은 한 생애를 ‘가족이 없는 듯’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삶을 살았다.

“선친의 삶은 가족이 없으신 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국, 애민만 고민하셨고 통일 문제에만 신경 쓰셨습니다. 한때는 선친의 피를 이어받은 데 원망도 했습니다.”

‘중원 6000리를 걸으며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꿈을 꿨던’ 2년은 ‘야곱의 베개’(창세 28,11)와도 같은 축복의 돌 베개가 됐고, 끝내는 광복으로 돌아왔다.

일왕이 항복한 뒤 8월 18일 미군과 함께 장준하를 포함한 광복군 부대는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지만,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군과 대치한다.

그때 일을 장 위원장은 이렇게 전한다.

“선친께서 여의도로 들어왔는데, 일왕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군과 대치하게 됐다고 합니다. 싸웠으면 광복군 부대는 물론 전멸이었겠지요. 하지만 선친께서는 미군의 제지로 싸우지 못한 걸 평생 후회하셨습니다. 그때 죽었으면 우리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작전에 참여해 승전국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중국으로 돌아간 장준하는 11월 환국,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약했고, 일시 조선민족청년단, 이른바 족청에 참가해 활동했으며 「사상계」를 펴내기도 했다. 그 공로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2공화국 때는 장면(요한 세례자) 내각에 입각하기도 했다. 5ㆍ16 쿠데타 이후 7대 국회의원으로,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광복군 출신 장준하와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특히 한일 국교 재개와 베트남 파병 반대, 유신헌법 개정 이후 반독재 투쟁을 거치며 갈등이 증폭된다. 특히 장준하 선생이 발행인으로 있던 「사상계」에 대한 세무사찰과 폐간 공작이 이어진다.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포천 약사봉으로 등반을 떠났고 그 와중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의문사’냐, ‘추락사’냐는 논란은 사건이 벌어진 지 43년이 되도록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003년 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참여했던 고상만(스테파노, 48)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재심법률지원 소위원회 부위원장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증언이 계속 엇갈리는 만큼 2012년 말에 확인된 장준하 선생 머리 뒤쪽 외부 두개골 가격 흔적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올 하반기 국회에서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다시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은 상당 부분 조사가 진행돼 있어 이번에 재조사가 이뤄지면 43년 동안 가려져 있던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고 부위원장은 내다봤다.

장준하는 사망 한 달 전에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평양교구 정주본당 출신 부인 김희숙씨가 평생 그리도 원했던 혼배성사도 받았다.

장 위원장은 “어렸을 때 반은 교회에, 반은 성당에 다녔다”며 “선친께서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천주교로 개종했지만, 그 이유는 어머니의 평생소원인 혼배성사를 하기 위해서였고,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뒤 김수환 추기경은 장례비가 없어 고민하는 김 여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장례비는 걱정하지 말라며 8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주례했고, 종로성당 광탄나자렛공원묘원 안장까지 주선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준하 선생의 대형 사진 앞에서 고인 탄생 100년의 의미를 설명한 장 위원장은 “암울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며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해나갈지, 그 뜻을 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선친은 삶 자체가 장정이었고, 그 장정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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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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