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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시성된 바오로 6세 교황과 로메로 대주교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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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바오로 6세 교황

‘가톨릭교회 현대화의 주역’
성 요한 23세 교황 뜻 이어 공의회 속개
모국어 미사·그리스도교 일치 노력 등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따른 교회개혁


불과 5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임기 중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의 뜻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그대로 이어졌다.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 교황이 선종하고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6세 교황은 자신의 교황명을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로 정했다. 이어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으로 착좌한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선포했다. 그리고 1965년까지 이어진 공의회를 통해 그는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으로 기록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오로 6세 교황을 일러 ‘위대한 키잡이’라고 칭송했다.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정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도록 이끄는 키잡이 역할을 함으로써, 그는 혼란과 분쟁, 갈등으로 가득했던 현대세계에서 가톨릭교회의 현대적 면모를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바오로 6세 교황은 1969년 한국교회 첫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을 임명했다.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1897~1978)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1920년 사제품을 받은 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대학에서 문학을 배웠다.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공부한 뒤, 이듬해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잠시 머문 뒤 줄곧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했다.

1954년 그는 밀라노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처음으로 교황청을 떠난 그는 왕성한 사목활동에 나섰다. 전쟁으로 부서진 많은 성당들을 고치고 신앙을 잃은 노동자들 삶의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섰다. 1958년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추기경에 임명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요한 23세 교황이 선종한 뒤, 1963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공의회 속개를 선언했다. 요한 23세 교황이 시작한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현대화, 세계화의 발걸음은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이어졌고, 1965년 폐막 때까지 수많은 위대한 결정들이 이어졌다.

공의회의 절정에 이른 제4회기 때에는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세계주교시노드 설립이 이뤄졌다. 현대교회사의 가장 위대한 성과인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서, 전례 개혁과 미사 중 라틴어 대신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와 무신론과의 열린 대화가 가능해졌다.

그의 교황직 수행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위해 노력했고, 공의회에 여성과 수도자, 평신도가 입회하도록 했다. 교황의 삼중관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 학자로 선포했다.

그의 진취적인 행보는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공의회 진행과 후속 조치의 실행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불협화음은 그를 향한 엄청난 비난으로 쏟아졌다. 가혹한 비난에 그는 스스로 자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할 만큼 고뇌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교회의 기본 입장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선언하는데 추호도 타협이 없었다.

1978년 8월 6일 바오로 6세 교황은 여름 별장인 카스텔간돌포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다.


■ 성 로메로 대주교

‘폭력과 불의에 맞선 순교자’
폭력으로 상처입은 약자를 위해
자유와 정의 향한 정치적 행보
미사 집전 중 괴한에게 암살 당해
2015년 순교자로 선포된 후 시복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대교구장이었던 오스카 아루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대주교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다 순교했다. ‘구세주’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살바도르(El Salvador)는 당시 역설적이게도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상적’이었고, 로메로 대주교는 불의에 맞서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다.

로메로 대주교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엘살바도르 국민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80년 3월 24일 로메로 대주교는 산살바도르의 프로비덴시아 병원에서 암 환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다 괴한들의 저격으로 암살됐다.

로메로 대주교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 산미겔의 치우다드 바리오스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유학 중이던 1942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이듬해 귀국해 산미겔교구 교구장 비서로 임명됐다. 이후 그는 23년 동안 교구 신문 편집장, 주교좌본당 주임, 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66년 엘살바도르주교회의 사무처장을 거쳐 1970년 산살바도르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1974년엔 가난한 농촌지역인 산티아고데마리아교구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1977년 산살바도르대교구장으로 임명됐을 당시 정부는 그를 환영했고 사제들은 실망했다. 로메로 대주교가 보수적이라는 평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보수적이었던 로메로 대주교가 1977년 그의 친구이며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함께 일하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살해당하면서 전향하게 됐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로메로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남미주교회의 문헌은 물론 ‘메데인 선언’(1968년)과 ‘푸에블라 선언’(1979년), 성 바오로 6세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등의 실천에도 관심을 가졌다. 특히 산티아고데마리아교구장 시절, 가난한 농민들의 현실을 마주한 로메로 대주교는 그때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말하기 시작했다.

로메로 대주교의 최측근이던 산살바도르대교구 보좌주교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추기경은 “로메로 대주교에게 ‘사람들이 대주교님이 전향했다고 말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대주교님께서는 ‘전향이 아니라 진화한 것’이라고 답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신학의 상징적 존재였다. 시복 절차는 이미 1993년 시작됐지만, 그가 정치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이유로 그의 시복을 반대하는 견해가 있어 지지부진했다. 이후 2007년 5월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한, 위대한 신앙의 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새 전기가 마련됐고,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2월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로 선포하면서 그해 5월 23일 시복됐다.

로메로 대주교는 풍부한 신학 지식을 가졌지만 전문 신학자는 아니었다.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던 엘살바도르 국민들의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참된 목자이자 예언자였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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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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