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1) 보물 찾기에 앞서

우리 곁의 보물 성미술, 알고 보면 더 아름다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1920년대 최초 성화가 장발이 등장하면서 한국 가톨릭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사진은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 제대 뒤편에 설치된 장발 작품 ‘14사도.’

▲ 1960년대 한국 가톨릭 미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영향으로 토착화돼 발전했다.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은 이 시기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사진은 혜화동성당 전면에 설치된 부조.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감춰져 있을 것만 같은 귀한 보물은 사실 우리 가까이에 살짝 숨어있을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숨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 성미술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특히 과거에 존재했던 여러 노력이 쌓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 중요성과 가치를 되짚어보고 재평가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그간 한국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사를 연구하면서 성미술 전반을 고찰하는 가운데 정리한 자료 중에서 아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살펴보며 우리 곁에 숨은 성미술 보물들을 함께 찾아가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첫 글에서는 본격적인 보물찾기에 앞서 우리나라 가톨릭 미술의 전반적인 흐름을 1970년대까지의 상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1890~194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는 1789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돼 20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받아들인 것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의 체결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서울대교구 약현성당(1892, 사적 252호)과 명동대성당(1889, 사적 제258호)을 건축하면서부터다.

이 시기에 들어온 성상과 14처,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주로 유럽에서 제작된 것으로 예술성을 논하기는 힘들지만, 최초로 교회 미술품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간과할 수 없다. 이후 1909년에 국내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가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설립하면서 제대와 독서대, 세례대, 전례 가구, 문 등을 직접 제작해 우리 손으로 만든 교회 공예품들이 등장하게 됐다.

1920년대에 들어 최초 성화가인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이 등장하면서 한국 가톨릭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 도미해 컬럼비아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1925년 귀국해 명동대성당 제대 뒤편의 ‘14사도’(1926)를 비롯해 현재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소장된 ‘김골롬바와 아녜스 자매’(1925), 서울 가르멜수녀원의 ‘성모 영보’(1945),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1941) 등 많은 성화를 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문학지 「가톨릭청년」에 ‘화랑’을 연재하면서 보이론(Beuron) 미술을 비롯한 서양 미술과 독일의 현대 교회 건축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관심은 이후에 총감독을 맡았던 서울 혜화동성당 건축에도 반영됐다.

한국인 화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1920년대에 제작된 또 하나의 중요한 성화는 서울 명동대성당에 소장된 ‘79위 복자화’(1926)다. 이탈리아 화가 주스타니안(Giustanian)이 제작한 이 작품은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봉헌된 ‘한국 79위 복자 시복’ 미사 때 제대 위에 걸렸던 작품 ‘영광’을 새롭게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등장인물들이 서구적으로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구도나 색채 면에서 완숙함을 보이는 걸작으로 훗날 제작된 순교 성인화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다.



1950~1970년대

해방 이후 장발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이 되면서 한국 작가들의 가톨릭 미술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시기에는 공예가 이순석과 조각가 김세중ㆍ김종영ㆍ장기은ㆍ차근호ㆍ송영수, 동양화가 장우성ㆍ서세옥, 서양화가 박득순 등이 서구적인 모방에서 벗어나 현대화되고 한국화된 작품들을 선보였다. 1954년 10월 성모성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도파화랑에서 개최된 ‘성미술전’은 화가와 조각가, 공예가들이 결속시켜 교회 미술 발전을 본격적으로 이끌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가톨릭 미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더 새롭고 토착화된 모습으로 발전해갔다. 1960년에 완성된 서울 혜화동성당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교회 미술을 위한 여러 작가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걸작이다. 건축가 이희태(요한)가 설계한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등록문화재 제230호)은 김세중(프란치스코) 등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 있어 한국 현대 종교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1970년대는 ‘서울가톨릭미술가협회’ 창설로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한 미술가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히 진행됐다. 1960년대에 이어 여러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이 각기 개성 있는 작품을 교회에 선보였다. 같은 시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독일인 신부 알빈 슈미트(Alwin Schmid)는 경북 지역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근대적인 성당 건축을 선보였다. 도미니쿠스 뵘(Dominicus Bhm),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tz)와 같은 독일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전국적으로 100여 곳에 단순하고 모던한 성당과 공소, 일반 건물 등을 설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벽화와 십자가,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 등 교회 미술 전반에 관심이 있었다.

역시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이었던 프랑스인 신부 앙드레 부통(Andr Bouton)은 본래 프랑스 비스크(Wisques) 대수도원 소속 화가 신부였다.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을 본 올라프 그라프(Olaf Graf) 신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된 그는 신앙 전파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국내에서는 청송성당을 시작으로 경북 일대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많은 벽화를 제작했다. 화풍은 프랑스의 야수주의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표현한 대상들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부활하는 예수상과 십자고상, 성모자상 등에 나타난 한국인의 모습은 외국인 화가 신부로서 토착화된 작품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품 다수가 지워졌지만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과 구미 원평동성당을 비롯해 몇몇 성당과 공소에 남아있다.



이후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작가가 각기 개성 있는 작품 경향을 드러낸 성미술 작품들을 선보이며 한국 가톨릭 미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다음 회에는 1954년에 개최됐던 한국 최초의 가톨릭 성미술 전람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새롭게 공개된 이미지 자료와 함께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들에 대해 알아보고 아직 소재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작품들을 함께 찾아본다.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8-12-0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19

잠언 18장 4절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이고 지혜의 원천은 쏟아져 흐르는 시냇물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