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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사연 공모전 수상작] ‘검은 닭’ 대접해서 미안해요

전인숙 수산나(원주교구 사북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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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이라니. 가톨릭평화방송을 보다가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이야기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고는 더 늦기 전에, 아니 내 기억이 온전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만난 그날 일을 기록하고 싶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검은 닭’이 연상된다. 검은 닭이라니, 아마도 몸에 좋은 오골계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몸에 좋은 오골계를 잡아 대접했어야 했는데 못 먹고 못 살던 그 시절엔 마음까지 가난했었는지, 말 그대로 검은 닭을 대접해드렸다.

아마도 족히 40년 가까이 된 이야기이다. 예나 지금이나 난 사북에 살고 있다. 40년 전 사북은 광산이 번성하던 때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석탄 가루로 까만 곳이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끗하게 씻겨 내보내도 저녁이면 콧구멍까지 새카맣게 돼 돌아오곤 했다. 검은 강물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던 아이들은 미술 시간에도 강물을 까맣게 그리곤 했다. 그렇게 검은 땅 위에 검은 강이 흐르는 탄광촌에서 난 살고 있었다.

아마도 농어촌 체험이라는 주교회의 결정이 없었다면 내 평생 추기경님을 직접 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건 주교회의 결정으로 사북성당은 초비상이 되었다. 신부님도 어려운데 거기에 주교님과 추기경님이라니. 하늘 같은 분들이라 정말이지 잘 대접하고 싶었다. 하여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농촌이니 보리밥을 해드리자고 합의를 보았다.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우리에겐 최선이었다. 그러다 양계장을 하는 자매님이 닭 10마리를 기꺼이 낸다고 했다. 그제야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는 느낌이라 정성을 다해 닭을 삶기로 마음을 모았다.

디데이. 추기경님과 주교님이 광산 체험을 하시는 동안 우리는 닭을 잡고 삶았다. 가마솥에 닭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고서야 물을 너무 많이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닭을 삶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을 떠내자, 그냥 삶자 논쟁이 오고 갔지만 닭죽이라도 해 먹을 생각에 그냥 두었다. 얼마나 삶았을까. 제법 고소한 냄새가 날 즈음 추기경님이 체험을 끝내고 오셨다.

주방이 분주해졌다. 내 마음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하얀 플라스틱 그릇을 꺼내 연기를 내며 닭을 삶고 있는 가마솥으로 다가갔다. 닭을 담는 순간 알았다. 검은 솥은 자주 쓰지 않으면 검은 물이 나온다는 걸. 잘 삶겨 허연 닭에 검은 물이 배어 둥둥 떠 있었다. 이런, 하느님 맙소사.

밥상은 이미 다 차려졌고, 추기경님과 주교님은 기다리고 계시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난 어쩔 수 없이 닭을 담았다. 하얀 플라스틱 그릇에 담으니 검은 국물의 검은 닭이 어찌나 더 검게 보이는지. 추기경님과 주교님께 대접하는 내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추기경님과 주교님들은 광산에 다녀오신 후라 시장하셨는지 아니면 우리들의 정성을 보아서 억지로 드셨는지 하얀 플라스틱 그릇 바닥이 드러나도록 검은 닭 국물을 다 드셨다. 그런 모습을 보고 간신히 용기를 내 말씀드렸다.

“죄송해요. 추기경님. 잘하려고 했는데….” “아니어요. 아주 맛있었어요. 고생하셨어요.” 추기경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추기경님을 보내 드리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난 그 검은 닭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검은 탄광 물을 떠 대접한 것 같아서 두고두고 미안했다. 아마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검은 닭 따위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정성이 부족하네, 마네, 내 멋대로 품평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검은 닭을 맛있게 드시던 그분의 우직한 바보스러움이 우리의 실수에 대한 자비이며 사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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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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