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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야소(耶蘇)도 모르느냐?”… 모진 고문에도 신앙 증거

‘사료로 보는 기해박해’ 공개 대학 6- 신태보 「옥중 수기」 / 현재우 박사(서강대 종교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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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박해 때 체포돼 전주 감영으로 압송된 신태보는 주리를 트는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굽히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다. 탁희성 그림




복자 신태보(베드로, 1769?~1839, 그림)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1811년 교황과 북경교구장에게 성직자 영입을 청하는 2통의 편지를 썼다. ‘신미년 서한’으로 불리는 이 편지는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쓴 첫 번째 서한이었다. 이 서한은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를 통해 비오 7세 교황에게 전달됐고,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유박해 후 1811년과 1813년 성직자 영입을 위한 북경 밀사 파견에 재정적인 뒷받침을 맡아 했다. 아울러 교우촌을 이루고 교회 서적을 필사해 나눠주면서 선교에 힘쓴 교회 지도자였다.

1827년 2월 전라도 곡성 덕실마을의 옹기점에서 교우들 간의 다툼이 벌어져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전라도는 물론 서울, 충청도,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천주교 박해가 확산돼 그해 5월까지 500여 명에 이르는 신자가 체포됐다. 이를 ‘정해박해’라고 한다. 정해박해로 전라도 교회는 초토화됐다.

신태보는 정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체포됐다. 전주 감영으로 압송된 그는 다리 살이 헤져 뼈가 드러나고 앉지도 못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혹독한 형문을 7차례나 받았다. 이후 그는 김대권(베드로), 이성화(베드로), 정태봉(바오로), 이일언(욥)과 함께 1839년 5월 29일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할 때까지 13년간 옥살이를 했다. 신태보는 순교할 당시 70세가량이었다.



▨신태보 옥중 수기

1837년 조선에 입국한 샤스탕 신부는 남쪽 지방을 맡아 사목했다. 그는 그해 교우촌을 사목방문하던 중 전주 감영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10여 년째 옥살이를 하는 신태보를 비롯한 5명의 증거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샤스탕 신부는 1838년 5월 서울로 올라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에게 이들에 관해 보고한다.

앵베르 주교는 샤스탕 신부에게 신태보로 하여금 조선 교회사에 반영될 옥중 수기를 기록할 것을 요청하게 한다. 신태보는 교우들로부터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요구를 전해 듣고 1838년 5월 이후부터 옥중 수기를 작성했다.

신태보의 「옥중 수기」 원본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안에 들어 있다.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는 1720년 이전부터 1814년까지 신태보를 비롯한 조선 순교자들의 순교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1874년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의 원사료일뿐 아니라 2009년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청원 때 주요 자료로 사용됐다.



▨신태보 옥중 수기 내용

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수록된 신태보 「옥중 수기」는 11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신태보 자신에 대한 소개와 옥중 수기를 작성한 동기를 적고 있다.

2. 1791년부터 1801년 신유박해 직후까지 주문모 신부를 찾아 나선 신앙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1791년 진산사건 이후의 변화와 남인파 교우들의 폐쇄적인 태도, 사촌 이여진과 성사를 받기 위해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는 여정, 주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한다.

3. 1799년 음력 8월 정조가 최필공을 불러 천주교를 믿고 있는지 심문하는 것을 적고 있다.

4. 1801년 신유박해 전후 교회 사정을 소개하면서 순교한 주문모 신부의 유품을 신자들이 공경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동정부부의 일화를 들려준다.

5. 신유박해 이후 구전되고 있는 기적들을 소개한다. 특히 주문모 신부 순교 당시 일어난 기적과 신태보 자신이 직접 목격한 기이한 현상을 전한다.

6. 1804년 체포된 사촌 이여진을 구명하기 위해 신태보 자신이 활동한 행보를 적고 있다.

7. 1801년 말부터 1815년까지 박해 이후 신자 공동체의 생활상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천에서 8일을 걸어 강원도 산골로 이주해 교우촌을 일구는 고초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8. 1827년 정해박해 때 신태보가 한때 배교의 뜻을 표한 적이 있다는 소문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변론이 삽입돼 있다.

9. 정해박해 때 경상도 상주 잦골에서 체포돼 7차례 형문을 받은 내용을 증언한다.

10. 미완의 수기를 순교로 완성한 장엄한 신태보의 삶을 다블뤼 주교가 서술한다.

11. 1840년 1월 4일 순교한 신태보의 며느리 최조이 바르바라의 문초와 순교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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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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