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화 비비안나(서울대교구 양천본당)
▲ 삽화=장희원 |
장애아들을 쓰임 받는 존재로 이끌려고 이십 년 넘게
애쓰는 가운데, 몇 년 전 큰 우환이 생겼다. 신심이 좋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던 시어른
안나님이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그때부터 또 다른 고행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안나님을 살려보려고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코 석션, 입안을 거즈로 닦기, 욕창이
안 생기게 좌우 번갈아 누이기,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손발톱 깎아 드리기며
간병도 꾸준히 했다. 안나님을 일으켜달라고 기도하며 정성껏 간병을 하니 처음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뇌를 많이 다친 탓에 몇 달 뒤부터 재활 훈련을 해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틀이 멀다 하고 간병 하느라 병원에서 살았고,
아기가 된 안나님을 좋아지게 하려고 아들에게 언어치료 하듯이 말도 가르쳤다. 그녀의
식사를 코 튜브로 시간 맞춰 챙겨야 했으므로 정작 내 식사는 놓치기 일쑤였다.
한번은 아들을 데리러 복지관에 가야 했는데, 안나님
병원에 있다가 시간을 놓쳐 토마스를 ○○역 벤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아들이
잘못 들었는지 역으로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자 혼자서 방과 후 활동을 하러 가 버렸을까, 아니면 누가 데려갔을까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또다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경찰서에 신고하려던 찰나에
복지관 선생님이 왔다고 연락을 주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토마스를 제자리로
보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연신 기도를 하며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아들에게
달려갔다.
이렇게 갑자기 예고 없이 건강하던 안나님이 큰 사고로
와상 환자가 되어 몇 년째 병원 순례를 하자, 우리 가족 4명의 삶이 바뀌어 살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저를 집에 두고 자꾸 할머니 병원에 다녀오니 토마스도
없던 불안이 생겼다. 이러다 내가 쓰러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 가끔 하혈을 하기도 했고 불규칙한 식사와 과로, 스트레스로 점점 야위어
갔다. 남편이 거듭 재촉해 건강검진차 병원에 갔다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위,
대장 내시경까지 했는데 심상치 않다며 재검을 하라는 것이다. 시간을 예약해 검사했더니
큰 수술을 해야 한단다. 세상에! ○○암이란다.
장애아들에 안나님까지 돌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앞이 캄캄했다. 양쪽을 신경 쓰다 보니 정작 내 건강에
신경을 못 썼다. 그 길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성체조배실로 달려갔다. “주님, 이건
아니잖아요? 어찌 기약 없는 십자가를 두 명을 주시나이까? 그간에 토마스를 키우며
애간장이 탔지만, 주님 덕분에 수없이 오뚝이처럼 일어섰어요. 이제 저를 쓰러뜨리면
토마스는 누가 돌보고 안나님은 어떻게 챙겨요? 늘 희생만 하는 큰애는요?” 대성통곡을
하며 주저리주저리 한참을 목 놓아 울었나 보다.
한동안 말없이 감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느님,
제발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이제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 역대기 상권 4장 10절 말씀이 떠올랐다. 한참 뒤 하느님의
음성인지 뭔지 모를 울림이 있었다. ‘비비안나야.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잘하고
있다’라고 했다. ‘어! 이건 뭐지’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음성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알 길 없다.
얼마 뒤 대학병원에서 수술했다. 남편이 휴가를 내서
챙겨주고, 토마스는 이번에도 큰애가 학교도 못 가고 며칠을 돌봐주었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벌벌 떨며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신발을 신고 집에 갈 수 있도록
집도의의 손을 이끌어 주소서. 말 못 하는 토마스를 두고 죽을 순 없어요. 아들이
말을 좀 할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 주세요. 동생 덕분에 고초를 겪는 딸도 너무
가여워요.’ 끊임없이 기도를 했는데 마취로 인해 이후의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뒤 깨어보니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몸 곳곳이 뻐근하고 아팠다. 지금까지 몇
개월에 한 번씩 온갖 검사를 하며 병원에 다니고 있지만, 기적같이 살려 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다. 앞으로 몇 년은 더 남았다. 토마스와 안나님을 돌보라고 살려주신 것
같았다.
“주님, 부족한 저를 어여삐 보시고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태어났으니 앞으로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행하며 살아야 했다. 큰 수술을 하고 살아나니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면역력이 떨어져 여기저기 아팠다. 시어른 기저귀를
갈아서 그런지 어쩐지 팔이 올라가지 않아 병원에 가 보니 오십견이란다. 예전에
오른쪽이 그랬는데 이번엔 왼쪽이 안 올라가고, 잠을 못 이룰 만큼 통증이 온 마음을
짓눌렀다. 원치 않던 불면증도 따라왔다.
아들과 장애인이 된 안나님도 돌봐야 했고 내 건강도 살펴야 했다. 삼중고였다. 사는 게 고해라더니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몸이 아프니 마음마저 나약해지고 갱년기 불안이 찾아왔다. 심정이 무너져 오직 신앙으로 극복해야 했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기도가 되지 않았다. 퇴원하며 먹은 굳은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토마스는 계속 돌봐야 했는데, 애들한테 짜증을 내었고 아들도 불안한지 재활용품에 집착했다. 딸마저 지쳤는지 “또 할머니 병원에 가세요?” 그랬다. 왜냐면 내가 병원에 가면 본인이 동생을 돌봐야 했기에 힘들었던 것이다. 사는 게 부질없고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하느님 이게 뭐예요?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이리도 큰 형벌을 주시나이까?”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달만 지내보자. 아니 이번 주만, 아니 하루씩 살아보자’ 해도 캄캄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고 내가 어찌 될 것만 같았다.
▲ 삽화=장희원 |
그동안 생활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야
했다. 이러다 거룩한 성가정이 깨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쳐서 주님을 외면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려서 매일 미사와 가정기도를 시작했다.
불안이 가슴에 차올라 오랫동안 기도하며 짬짬이 기록해 두었던 묵상 노트를 펼쳤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이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말없이 나타나 우리를 살리시고 지혜와
자비를 주셨다.
그때부터 ‘감사 한줄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를
반추하며 일기도 가끔 쓰지만 바쁠 때는 감사했던 것을 억지로라도 찾아 쓰기로 했다.
처음엔 세상천지에 나만 힘든 것 같아 감사한 것도 없고 쓸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 쓰다 보니 소소한 게 감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큰애도 감사 노트에 ‘나를
낳아주고 키워 주는 부모님께 감사하다.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밥을 차려주는 엄마께
감사하다’ 등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2014년 하반기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 노트를 보면 우리 집의 근황을 알 수 있다. 집에 쓰나미가 밀려올 땐 감사 노트 한 줄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안나님도 그대로 병원에 누워 있고 상황은 바뀌지 않았으나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니 원망마저 감사로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인생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풀린다 했던가. 올해 들어 감사 노트에는 이런 게 쓰여 있다. ‘이탈리아에 계신 신부님께서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시어 감사하다. 현관 센서등을 갈아 끼워 준 남편에게 감사하다. 욕실 샤워기 헤드를 갈아준 딸에게 감사하다. 설거지를 해 준 토마스에게 감사하다. 학부모 연수 강의 잘하라고 격려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다 등 그간에 씨 뿌렸던 수많은 감사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아들이 복지관에 가 있는 시간을 쪼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고 일기처럼 글도 쓰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누군가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글을 써서 희망을 주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사람들에게 초록 신호에 건널 때도 끝까지 횡단보도 안으로 지나가야 한다는 것도 계속 알렸다. 더이상 안나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 키운 얘기도 써 보았더니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세상을 밝히는 글을 써서 지친 분들을 위로하고 싶다.
작년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몇 달간 연수를 받고
‘장애 이해 교육 강사’ 자격을 취득하여 강의 봉사도 하고 있다. 토마스와
안나님 덕분에 살아있는 수업을 할 수 있어 고맙다. 컴맹에 가까운 내가 PPT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강의하는 것이 소명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음이 감사하고, 그렇게
배운 것으로 봉사며 수업을 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치유자이신 주님, 저를 보살펴 주시어 여러분 앞에 서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매일 미사를 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못 드리면 평화방송 미사를 드린다. 힘들 때마다 평화방송 앱으로 위로를 받는데 ‘가톨릭 뉴스’와 ‘기도를 부탁해’ 프란치스코 교황님 관련 소식 등이 쓰러질 때마다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준다. 우리만 알기 아까운 보배로운 성구나 감동적인 강론이 많아 선교차 지인들께 띄워 드리고 있다.
동생을 챙기며 애쓰는 딸에게 마땅한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다. 주님께서 토마스에게 수호천사를 붙여주시어 대화를 잘하게 도울 것이라 믿는다. 세수하고 얼굴을 닦으며 “사랑의 주님, 오늘도 살려주시고 지켜주소서. 아멘” 하며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몇 가지 일정을 하고 집에 오면 성가정상을 끌어안고 “사랑의 주님, 집으로 인도해 주시어 감사드리고 쓰러지지 않게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성가정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하고 기도를 드린다. 아무리 외롭고 힘든 날도 주님께서 돌봐주시어 여기까지 걸어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꿈같은 나날이다.
기도가 이루어져 작년부터 ‘성서 백주간’을 하고
있다. 그전엔 집회서 말씀을 먹고 살았는데 신명기나 시편의 말씀도 은혜롭고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을 준다. 성경 묵상과 나눔을 하니 삶이 더 간절하고 애틋하다. “치유자이신
주님, 오늘도 주님의 집에 초대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간 성가정을 꾸려 살며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은총의 나날을 살게 도와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건강과 지혜, 용기와 평화를 주소서.” 지난번 묵상 때의 기도이다. 이렇게 기쁘게
살아도 되나 싶다. 살아있음이 그저 감사하다.
필리피서 4장 13절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는 우리 가족을 살게 하는 말씀이다.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아들이 거실에서 무엇을 하는지 불안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지겨워 포기하다, 말씀 붙들고 일어나 다시금 용기를 낼 것이다. 힘겨워도 내게 보내준
십자가들은 은총의 선물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찾게 해 준 원동력이다. 하느님께서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 믿으며 모든 것을 주님과 성모님께 의탁하리라.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장마에도 끝이 있듯이 고생길에도 끝이 있단다” 하셨으니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으며 묵주를 돌린다.
이제 주님과 함께 인생 2막의 소명을 실천하러 가야겠다.
글도 쓰고 장애 인식 강의도 하면서. 엊그제는 5학년 수업을 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도
장애가 있는 큰형이 있는데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피아노도 잘 치고 컴퓨터도
잘한다고 했더니 “정말요?” 하면서 눈이 동그래졌다. ‘내 소명을 찾게 하려고
토마스를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엄마가 글을
쓰고 장애 이해 교육 강사가 될 수 있겠니!’ 아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오히려
아들로 인해 삶의 힘을 얻는다. 소명을 찾아 준 토마스가 오늘따라 보고 싶다. “하
선생님! 두 시간 강의료 2만 원 입금했습니다.” 아직 강의료는 봉사 수준이지만
주님께서 허락하는 한 PPT를 멋지게 만들어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