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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걷는 한양도성길은 가을밤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흙을 밟으며 가을바람을 맞고 있으면 도심의 번잡함을 잠시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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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단성사 터에 있는 천주교 신자 순교터. 좌ㆍ우 포도청에서 순교한 신앙 선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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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희문은 과거 서울 도성 안 시신이 나가던 곳으로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지금은 도심 속에서 옛 수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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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성당에 있는 칼을 쓴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두 팔 벌려 신자들을 맞이하는 듯하다. |
퇴근 후 명동대성당 앞을 지나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알리는 표지판을 봤다. 달이 유난히 밝아 그럴까, ‘일몰 후 걷는 순례길은 어떤 모습일까, 가을 야경이 멋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하루, 길을 걸으며 말씀의 위로를 받고 싶어 ‘말씀의 길’(명동대성당~가회동성당 9개소, 8.7㎞) 순례에 나섰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유혹 많은 순례길, 그래서 더 순례가 된다
밤에 걷는 순례길에는 유혹이 많다. 공복이라 그런지 거리에 가득 찬 고기 굽는 냄새와 치킨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공기가 가라앉는 밤이라서 자동차 엔진음이 유난히 크게 들리고 배기구에서 뿜어나오는 매연에 정신이 산란해진다. 홀로 걷다 보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직장 동료들과 치맥이나 할 걸 그랬나”라는 후회도 든다. 그것도 잠시, 순례길 표석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순례 중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장악원 터, 이벽의 집터를 지나 ‘좌포도청 터’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에 갇혔던 신앙 선조들은 이 시간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눈을 감고 묵상해 본다. 살을 에고 뼈를 부수는 고문이 끝나고 찾아온 적막, “배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관리에 말이 귓가에 맴돌았으리라. 춥고 허기진 육신은 순교의 화관을 쓰겠다는 마음과 달리 뜨끈한 국밥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주님을 구세주라 믿기에 견디기 힘든 고난도 은총으로 받아들였으리라. 노점에서 어묵으로 허기를 달랠까 하다 순교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순례길의 야경도 볼만해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불금(불타는 금요일) 술자리 1차를 마친 사람들이 2차를 가기 위해 더 붐비는 것 같다. 인파를 뚫고 도착한 종로성당. 성당 마당 한쪽에 자리한 칼을 쓴 김대건 신부 동상이 두 팔 벌려 순례객을 맞는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한 이들은 광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던져졌다. 광희문을 지나 천국으로 향한 순교자들을 뒤로 한 채 서울 한양도성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한양도성 길에 들어서자 자연 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도심과 확연히 다른 공기에 각종 소음과 불빛도 인파도 없다. 잠시나마 도심에서 해방이다. 성곽을 은은히 비추는 불빛 아래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니 몸도 마음도 치유받는 느낌이다. 도보로 3시간쯤 걸리는 말씀의 길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앞을 지나 가회동성당에 도착하면 순례 여정을 마칠 수 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정이다.
바쁜 일정에 시간을 내 순례를 가기 힘든 이들에게는 밤에 걷는 순례길을 추천한다. 말씀의 길보다 거리가 더 긴 ‘생명의 길’(가회동성당~중림동약현성당 9개소, 5.9㎞), ‘일치의 길’(중림동약현성당~삼성산성지 8개소, 29.5㎞)도 시간이 된다면 권하고 싶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당과 몇몇 순례지 체험관 등은 일몰 후 출입이 안 되니 주의해야 한다.
따릉이 활용하기
새남터 순교성지에서 한강공원을 따라 절두산 순교성지로 가는 길은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다. 신용산역 6번 출구 앞에서 ‘서울 자전거 따릉이’(www.bikeseoul.com)를 빌려 절두산 순교성지를 지나 합정역 따릉이 보관소에 자전거를 반납하면 된다. 누리방에서 서울 자전거 따릉이 사용법을 익히고 이용한다면 순례에 새로운 경험까지 보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