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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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피부색 상관없이 인술 펼치는 ‘착한 사마리아인들’

인권 주일 - 춘천교구 예리코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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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로덴치과 김규진 대표원장이 예리코클리닉을 찾은 이주노동자를 치료하고 있다.

▲ 오세호 신부가 예리코클리닉을 찾은 이주노동자에 진료 과정을 안내하고 있다.




‘병 키우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

아플 때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흔히 듣는 말이다. 아플 때 의료 혜택을 받는다는 건 ‘인권’이라는 단어를 빌리지 않아도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가난한 외국인노동자에게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불법 체류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은 더 딱하다.

인권 주일을 맞아 이주노동자들에게 사랑의 인술을 펼치는 춘천교구 예리코클리닉(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소재)을 찾아갔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아픈 외국인노동자들의 벗

주일 오후 1시 반, 예리코클리닉을 찾은 자원봉사자들이 이주노동자 진료 준비에 한창이다. 오늘은 내과, 외과, 안과, 산부인과, 한방과, 치과 치료가 있는 날이다. 진료 시작 30분 전이지만, 대기실에는 10여 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대부분이지만 파키스탄, 스리랑카, 몽골, 이란에서 온 이들도 있다.

예리코클리닉 담당 오세호(춘천교구 사회사목국장) 신부는 “환자의 국적과 종교, 비자 유무를 떠나 치료한다”며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병원의 이름인 ‘예리코’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일화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에서 따왔다. 예리코클리닉은 성경 속 예리코처럼 눈먼 이를 고치신 주님이 살아계신 곳이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의지가 모인 곳이다. 예리코클리닉은 2003년 춘천교구 가톨릭의사회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가산성당 마당에 천막을 친 야전병원에 불과했다. 이후 가건물을 거쳐 지난 8월에 2층짜리 건물을 신축하고 교구장 김운회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지금은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간호사, 치위생사, 임상병리, 통역, 환자관리 등 수 많은 분야의 자원봉사자가 매월 첫째, 셋째 주일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



그래도 무료진료소가 있어서

예리코클리닉 설립부터 봉사를 이어온 윤미현(마르셀라, 49) 간호사가 분주히 움직인다. 윤씨는 “진료 접수부터 혈압과 체온, 체중 등 환자의 신체 등을 측정하고 어떤 과에 가야 할지 분류한다”며 “하루를 온전히 내어줘야 하는 일이지만 치료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생각하면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접수를 마친 이주노동자들은 각 진료과를 찾아 치료를 받는다.

이주노동자들이 의료진과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병원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감기, 혈압, 당뇨, 충치, 근육통 등 생활 속 질환에 대해 상담하고 처방을 받는다. 1층 치과에서 치료를 받은 필리핀인 그레이스 모레스(55, 가명)씨는 “친구에게 무료 병원이 있다고 듣고 강원도 철원에서 왔다”며 “병원을 갈 수 없어 아파도 참았는데 치료를 받고 좋아졌다”며 예리코클리닉에 고마움을 표했다.

2층 한편에 자리한 한의과에서는 침대에 엎드려 침을 맞고 부황을 뜨는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이웃집 아저씨 같다. 처음에는 침을 놓고 피를 뽑는 것에 놀라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치료를 받으며 잠들기도 한다.

이곳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은 인천과 평택 등 먼 지역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치료를 받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치료 비용도 문제지만 비자 문제가 얽힌 이들이 적지 않기에 병원을 찾을 엄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



도움 필요한 사람을 서류로 분류해야 하나

“여기서 진료하기 어려워서 큰 병원 가서 진료받을 수 있냐고 하면 10명 중 1, 2명 정도만 병원에 갈 수 있다고 하죠.”

엄규동(대건 안드레아, 72) 예리코클리닉 회장은 “이곳을 찾는 다수의 이주노동자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불법 체류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보건복지부 등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는 정상적인 비자가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엄 회장은 “3년 전 가슴에 종양이 있는 이주노동자에게 큰 병원을 가야 한다고 했지만, 의료보험 카드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며 “대형병원에 계시는 수녀님께 환자를 연결해 줬지만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법을 바꿔서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 의료혜택이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불법 체류자들이 많이 있는 나라의 대사관 같은 곳에서도 힘을 써서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을 도와주길 바란다는 말도 꺼냈다. 아픈 이들의 고통에 함께 울어주는 노(老) 의사의 말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돕는 사람이 누군지 가리고 도운 게 아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몇몇 이주노동자들이 처방받은 약 봉투를 들고 밝은 표정으로 예리코클리닉을 나선다. 그들이 받은 치료와 손에 쥔 약은 단순한 의료 혜택이 아닐 것이다. 약 봉투 안에는 피부색은 달라도 같은 주님의 자녀, 사랑받을 권리와 봉사자들의 헌신, 이국땅에서 고난을 이기고 고향으로 건강히 돌아갈 희망이 담겨 있다.



후원 문의 : 033-264-3547, 예리코클리닉

후원 계좌 : 신한 100-032-914833,   예금주 : (재)춘천교구천주교회



▲ 춘천교구 가산성당에 자리한 예리코클리닉.






#오세호 신부(예리코클리닉 담당)



▲ 오세호 신부



“예리코클리닉을 신축할 때 이주노동자들이 필리핀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발적 모금을 해 370여만 원을 전달했어요. 그들에게 적은 돈이 아닌데 고마움을 표현한 거죠.”

오세호 신부는 “교구의 지원과 여러 사람의 정성으로 진료소를 신축하고 서울과 의정부에서도 봉사자들이 오기 시작했다”며 “교회를 중심으로 신자와 비신자가 외국인노동자 진료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천 일대는 물론 인접한 강원도 지역에도 외국인노동자가 증가하는 추세지만 경기 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를 진료하는 민간시설은 예리코클리닉이 유일하다.

오 신부는 “계속 노동자가 유입되니 불법 체류 노동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고 병원에 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예리코클리닉은 일반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한 의료진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리코클리닉은 최근 포천 지역 8인 이상 사업장 1800여 곳에 이곳의 의료활동을 알리는 홍보문을 발송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더 많은 외국인노동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든든한 봉사자와 후원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 신부는 “봉사자들은 자신이 가진 탈렌트로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모였다”며 “하느님 사업이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점점 나아지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월 2회 진료에서 매주 진료로 확대하려고 계획 중”이라며 “봉사를 함께할 분들과 영적 물적 후원으로 뜻을 함께해줄 은인들이 많이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말했다. 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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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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