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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아래 일군 믿음의 터전… 빨치산 공격에 잿더미로 변해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5) 전주교구 수류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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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남(왼쪽) 할아버지와 장병오 할아버지는 1950년 9월 24일 빨치산이 수류성당에 불을 지르는 현장을 목격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공산군은 인천상륙작전과 9ㆍ28 서울 수복으로 점점 밀려났다. 하지만 공산군이 패퇴하며 남한 지역 신앙 공동체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남한의 인민을 해방하려고 왔다는 공산군의 태도는 퇴각하면서 180도 바뀌었다. 공산군이 감옥에 가두어 뒀던 인사들과 양민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전주교구 수류성당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수류성당에 피신한 사제들은 잡혀가고 빨치산에 의해 성당이 전소됐다. 더욱이 신자들은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죽음으로 내몰렸다. 전북 김제에 자리한 수류공동체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 70년 전 전쟁의 포화 속 신앙 공동체가 겪은 비극을 전한다.



주일 오전, 화마에 쌓인 수류성당

“사제들이 피신 가고 주일 미사가 없었어요. 그래도 신자 10여 명이 성당에 모여 기도도 하고 담소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을 든 군인들이 성당을 포위해 들어오더군요.”

수류성당 사무실에서 만난 장병오(가시미로, 90) 할아버지는 1950년 9월 24일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장 할아버지는 “빨치산(공산 비정규군)이 성당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보고 한 신자가 성당 문을 걸어 잠갔지만 부서지라 문을 두드려 문을 열었다”며 “나를 포함한 몇몇 젊은 신자들은 그들이 성당에 들어오기 직전 빠져나가 인근 야산으로 피신했다”고 했다.

장 할아버지는 군인들을 보자 빨치산이라는 것을 직감한 데는 이유가 있다. 수류는 모악산 자락과 연계되어 있고, 인근 완주군 구이면 장팔리는 빨치산의 본거지로 유명한 번개병단이 주둔 중이었다. 이미 빨치산들이 인근 지서를 습격하며 주민들의 불안감도 고조됐던 터다.

고영남(베네딕토, 92) 할아버지도 그날 성당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놈들이 밤티(율치) 쪽에서 넘어왔는데,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군인이 온다고 반갑게 나갔지만 나는 영 의심스러워 성당 맞은편 영철이네 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집 머슴도 국군이 온 줄 알고 나왔다가 빨치산이라는 것을 알고 길 반대편으로 담박질했어요.”

산으로 숨은 교우들은 먼발치에서 성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빨치산들은 성당에 남은 신자들을 협박해 곳간에 있는 나무 다발을 성당 안으로 옮기게 했다. 성당에 불을 지를 것을 예감한 몇몇 신자가 몰래 성당에서 성물들을 빼내 오기도 했다. 목조로 건축된 성당은 이내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성당 내에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장 할아버지는 “그날 성당에서 신자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빨치산들도 인근 지서의 경찰이 올까 봐 불만 지르고 도망간 것 같다”고 했다.

하늘을 뚫고 나갈듯한 화염에 쌓인 성당은 1시간 넘게 탄 후 잿더미가 됐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성당에서 4㎞가량 떨어진 원평지서에서 치안대가 도착했지만, 그마저 4~5명에 불과했다. 고 할아버지는 “빨치산에 비해 치안군 숫자가 적어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치안군은 해산하고 신자들 대부분 원평 쪽으로 몸을 피했다.


▲ 빨치산에 의해 전소되기 전 수류성당. 1907년 48칸의 목조 성당으로 지어졌고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이 특징이다.



공산당의 감시 하에 놓인 교우촌

수류성당의 시련은 예견된 일이었다. 수류본당은 대부분 구교우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다. 1889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설립했던 배재본당이 수류본당의 전신이다. 이후 수류공소로 시작해 임시 성당이 생기며 제대로 미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신자들이 수류로 이주해 교우촌을 형성했다. 1907년에는 48칸의 목조 성당을 건축했는데, 웅대한 한국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수류 일대에서 70여 가구가 교우촌을 이뤘고 신자들은 조과(아침기도), 만과(저녁기도)를 바치며 천주를 따르는 모범을 보였다. 신자들은 가진 것이 없었지만 나누며 베풀 줄 알았고 지상에서 천국을 살던 이들이었다. 더욱이 수류공동체를 거대한 팔처럼 감싸 안은 모악산 자락은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고 안정감을 주는 형상이다. 어쩌면 전주교구 사제단이 수류성당으로 피신한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천주교 전주교구사」에 따르면 7월 14일, 공산군이 대전까지 내려오자 김현배 교구장은 수녀들과 신부들에게 피난할 것을 명령했다. 교구장 이하 수녀들과 신부들은 수류성당으로 몸을 피했고, 교구의 중요 문서 역시 수류성당 마당에 묻었다. 이 문서를 수류까지 옮긴 사람은 당시 신학생이었던 안복진 신부다. 항아리에 문서를 넣고, 문서가 상하지 않도록 쌀겨를 넣어 수류성당 뒷마당에 묻어 당시의 모든 문서는 오늘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두 할아버지는 “전쟁 전 이미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 중에 북쪽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며 “여기가 교우촌이다 보니까 공산주의, 좌익 쪽에서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교구에서 이쪽으로 피난 왔다”고 입을 모았다. 정치보위부원이 이미 지역 곳곳에 숨어들어 있었다. 더욱이 모악산에는 김일성의 조상 묘가 있다고 한다.

두 할아버지는 “보위부원들이 여기 들어와 조사를 하니까 신부님들이 다시 피난 갔다”고 회상했다. 오래된 일이라 그런지, 사제들의 체포가 비밀리에 진행된 것인지 두 할아버지의 기억과 교구의 공식 기억은 사뭇 달랐다.

당시, 전주교구 신부와 수녀들은 거의 다 수류성당에 모여 있었다. 그중 몇몇 신부가 각자의 본당으로 돌아갔고 8월 2일경 체포돼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 이틀 뒤 수류에 있던 김현배 교구장과 이약슬ㆍ김재덕ㆍ김영구 신부, 이대권 부제 등은 전주 형무소에 수감돼 문초와 모진 고문을 당하다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8월 16일 보도연맹원에게 끌려간 수류본당 주임 김후성 신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원평 냇가에서 죄수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죽이기 시작하는데 교화소에 죄수들을 감시하던 변동무라는 사람이 김 신부를 슬그머니 끌고 가서 내무소 화장실에 넣었다고 한다. 변동무라는 사람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재주껏 살아보라며 김 신부를 언덕 아래로 밀어 던졌다. 김 신부는 논둑을 타고 공소 판공 때 머물렀던 집 장롱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 전주교구 수류성당 전경. 한국전쟁으로 성당이 전소하자 신자들은 한마음으로 1959년 새 성전을 봉헌해 신앙을 이어왔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들

9ㆍ28 서울 수복으로 고립된 빨치산의 만행은 극으로 치달았다. 장병오ㆍ고영남 할아버지는 9ㆍ28 서울 수복 후 빨치산이 주민들을 본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광렬(요한,96) 할아버지는 수류성당 방화 후 마을에 나가 신자들을 죽이면서 학살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학살 시점은 엇갈렸지만, 수류 인근 장팔, 항가리, 계곡리, 안덕리 등은 밤이면 인민공화국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장 할아버지는 “빨치산들이 기습적으로 마을에 내려와 교우들 집에 불을 지르기를 반복해 주택 90가 불에 탔다”며 “성당이 있는 지역이라며 우리 동네에만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장 할아버지는 서울 수복쯤 군대에 가서 그 뒤 일은 잘 모른다며 자신보다 두 살 많은 고영남  할아버지가 치안 일을 해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고영남 할아버지는 “주민들이 은평에 가 있어도 이 동네에서 농사를 짓고 또 살림살이가 있어 잠시 집에 왔다가 빨치산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었다”며 “빨치산은 남녀를 막론하고 돌과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락이라도 주우러 돌아오는데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나와 버리니 안 잡힐 재주가 없었죠. 잡혀갔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어요.” 고 할아버지는 “같은 동네에 살더라도 신자가 아닌 사람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빨치산들은 인민재판을 통해 공산당에 비협조적인 존재, 즉 천주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빨치산들은 수류공동체 신자들을 주요 먹잇감으로 삼았다. 「천주교 전주교구사」를 보면 박석규(발다사르, 36)는 10월 30일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박복순(루치아, 41)은 집에서 체포돼 엎고 갔던 아이와 함께 싸늘한 시신이 됐다. 성당 방화 당시 극적으로 살아난 조귀암(발다사르, 37), 조순복(요셉, 41), 서복수(25) 등도 잡혀 생을 마감했다. 50여 명의 신자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농사를 짓는 주민을 지키기 위해 치안대가 동행하고 일이 끝나면 은평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1951년까지 이어졌다. 지역에 초소를 짓고 30여 명의 치안대가 주둔한 후에야 빨치산은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전쟁 후반 빨치산들이 군경에 쫓겨 지리산까지 밀려나며 마을은 조금씩 평화를 찾아갔다. 고영남 할아버지는 “참 신앙생활 열심히 하던 교우들이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빠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한것 같다”고 털어놨다. “죽은 분들 모두 다 잘 알던 사람들이었어요.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시간이 흘러버렸어요. 우리도 잡히면 죽는다는 공포감에 정신이 없어 목숨을 잃은 신자들을 위해 연도도 제대로 못했어요.”


▲ 슈류본당 이종승 사무장이 포탄을 잘라 만든 종을 치고 있다. 미사 30분 전 치는 종은 그 소리가 반경 1㎞까지 퍼져 나간다.

다시 일어선 공동체

할아버지들의 증언을 듣고 이종승(미카엘) 사무장을 따라 성당으로 올라갔다. 고딕건축 양식으로 아담하게 지은 지금의 성당은 1959년 신자들이 직접 흙짐을 지어 나르며 건축해 봉헌한 곳이다. 수류본당은 전쟁 중인 1951년 김제본당으로 편입됐고 살아남은 수류 신자들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신자들을 기억하고 새 성전 봉헌을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신앙의 뿌리 깊은 나무는 전쟁의 화마도 이겨내고 한국은 물론 동양권에서도 가장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동체로 성장했다. 성당 옆 수류공동체의 역사를 전시한 건물에는 수류 출신 성직자와 수도자 30여 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지만 수류공동체 역시 신자 고령화에 전입 인구는 거의 없어 매년 신자가 줄고 있다. 주말이면 ‘아름다운 순례길’을 지나는 순례객들이 방문하기는 하지만 예전 같은 활기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 사무장은 “매년 10여 분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110여 분이 미사에 참여하시고 그마저도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많다”며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위험하니 집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미사 참여 의무를 대신하라고 말씀드려도 성당 가는 길이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성당에 나오신다”고 했다. 신앙으로 살던 어르신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성당에 기부하기도 했다. 땅 기부만 110여 건에 시신을 기증하는 이들도 있었다.

성당 곳곳을 둘러보고 나가는 길, 성당 앞에 설치된 낡은 종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사무장은 “신자들이 대형 포탄을 이용해 종을 만들었고 지금도 미사 30분 전이면 종을 쳐 미사 시간을 알린다”며 “누가 언제 종을 설치한 지 모르지만, 종소리가 반경 1㎞ 가까이 들린다”고 했다. 이 사무장이 종을 치자 은은하고 맑은 종소리가 모악산 자락을 향해 퍼져 나간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종소리이겠지만, 수류공동체 신자들에게는 지상에서 미리 듣는 천상의 소리일 것이다.

도재진·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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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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