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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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신앙체험수기] 대상 /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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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장희원



세례성사를 받은 지 올해로 꼭 55년이 되었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기억들이 어제 일인 듯 선연한데 유수와도 같이 흘러가버린 세월이다. 순례자처럼 때로는 도시의 방랑자가 되어 배회하며 걸어온 지난날들의 서사는 그대로 나의 인생길이었을 것이다. 아스라한 저 너머 흑백사진처럼 피어오르는 영상.

눈이 소복이 쌓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가난하고 고요한 그해의 성탄절에 나는 세례를 받았다. 삼백이십 조항 교리문답 책을 달달 외우고도 모자랐는지, 일 년 반 동안이나 착실하게 교리 공부를 하면서 세례를 받기 위해 열심을 다해 집중했다. 그나마 평생 밑천이 되어준 교리의 기본기도 따지고 보면 이때 또박또박 외워둔 작은 문답 책에 기인한다.

어린 나이에 뭘 바라고 대체 무엇에 홀렸기에 그리도 정성이 뻗쳤던 것일까. 예비자 기간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새벽 미사를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누가 억지로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성당에 매달렸는지 알 수가 없다.

세례받는 날에는 순결의 표지로 하얀색 정장이나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함께 교리 공부를 한 대다수 영세자가 가톨릭 신자로 새롭게 태어나는 그 날의 예식을 위해 도톰한 공단에다 자수를 놓은 새로 맞춘 진줏빛의 화려한 한복을 갖춰 입고들 나왔다. 축젯날처럼 멋들어지게 흰 드레스를 빼입고 나온 여인들도 있었다.

곤궁해진 집안 형편을 온몸으로 익히 체감하고 살고 있었기에 나는 어머니에게 세례식 날을 위한 한복을 맞춰달라고 차마 입을 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혼자서 고민하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의 장례 날에 상복으로 입었던 얇은 광목의 소복을 꺼내 입고 세례식에 갔다. 동지섣달 엄동설한인데 강추위에 덜덜 떨었을 터이건만 이상하게도 추웠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교리 공부 장소인 성당 수녀원 2층 강당의 삐걱거린 마룻바닥 소리까지 귓전에 생생히 울려 오건만은.

언제 걸어도 성당으로 올라가는 숲길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시가지 한가운데의 고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시내 어디서나 바라다보이는 고딕 양식의 고풍스러운 공주 중동성당은 참으로 정경이 아름답다. 평생을 두고 그리움을 주는 내 마음 속의 풍경이다.

함께 세례를 받은 간호고등학교 언니들의 얼굴과 세례식의 분주한 예절들. 대모님의 모습까지도 선히 떠오른다. 교리를 가르친 안경 쓰신 깐깐한 원장 수녀님의 단호한 목소리와 세세한 표정도 어제 일처럼 눈에 잡힌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모향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그때는 가톨릭 교리가 어찌나 엄격했던지, 결혼하기 전까지는 약혼자끼리 뽀뽀만 해도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수녀님은 눈 하나 깜빡 않고 윽박질렀다. 함께 손잡는 것은 괜찮지만, 그 외의 스킨십은 모두 다 죄가 되는 것이라고. 까딱 잘못했다간 영락없는 지옥행이라 십계명을 거스르지 않고 죄를 피해서 도망 다니느라 무던히도 긴장하고 애썼던 그때가 잊히지 않는다. 예비자 교리 시간에 주입된 선악에 대한 경계가 아마도 나의 윤리관을 형성한 기준점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 이치라는 것은, 또 그것을 가르는 척도는 시대적인 배경과 문화적 요소가 작용하기 마련이다. 지금 세상에는 절대악이라는, 절대선이라는 양분된 개념조차 실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모호해지지 않았는가. 그만큼 어둑한 시대를 내가 살아왔구나 싶어 생각하면 헛웃음 나오는 금기조항들에 대한 제약이 그때는 교회 안에 무수히 많았다.

오직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양심을 가르는 데서 조금 큰 계명을 어기면 가차 없는 대죄요, 소소한 잘못들은 소죄로 떨어지고 마는 어차피 죄인의 프레임인 셈이다. 마치 중세 시대를 건너온 것 같은 현대인의 심리에서 지금처럼 두터워진 회색 지대는 상상 밖의 영역이었다. 이래저래 죄라는 범주를 헤어날 도리가 없으니 하느님은 심판자로 군림하는 무서운 신! 당연히 고해성사는 가장 중대한 성사 중의 성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느님은 분명 선 자체 사랑 자체일 터인데. 선을 강조하려고 그와는 반대급부인 죄악을 너무도 부각하다 보니 온 세상만사가 죄가 되어버린 모순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철저하고 엄격하게 잘 교육 받은 예비신자 기간을 거치고서야 세례성사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운명처럼 가톨릭 신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리라. 철두철미하게 받은 교리교육 덕분인지 이래저래 세상이 많이 변했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에서의 내 위치는 어김없는 일개 중죄인에 불과할 따름이다.

마지막 찰고가 끝나자 파란 눈의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본당 신부님은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데트를 나의 수호성인으로 정해주셨다. 유별나게 몸이 가녀리고 나약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허약했던 베르나데트 성녀를 떠올리셨는지도 모른다.

‘베르나데트’라는 세례명을 받고 성교회의 딸로 다시 태어난 날 성탄절의 자시 미사에서 첫영성체를 하였다. 미사 봉헌 때면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이 대단한 특권을 누리는 영혼들처럼 생각되어 몹시 부러웠는데 아아 이제는 나도 성체를 영할 수가 있는 거로구나, 그 점이 가장 두근거리고 뿌듯했다. 지극한 감동이 몰려왔다. 그토록 신비스럽고 동경했던 성체를 내 안에 모신 것이다.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저 하얀 밀떡은 대체 무슨 맛일까? 동그란 작은 형상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성체를 영하면 배가 부르겠지? 그것이 못내 신기하고 궁금했었다. 그때는 세 시간 전부터 공심재를 철저히 지켜야 해서 영성체를 하는 사람은 온전히 한 끼를 굶어야만 했다.

신앙심에 불타올랐던 나는 비록 영성체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예비신자의 처지였음에도 미사성제 때마다 주님께 바치는 희생의 표시로 언제나 공심재를 지켰다. 그래서인지 성당에 오갈 때면 늘 허기가 지고 배가 고팠다. 이렇게까지 갈구하며 준비한 성세(聖洗)의 의미는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하는 성체성사로 하여 그 기쁨을 한껏 배가시켜 주었다.

세례받을 날이 다가오자 원장 수녀님은 첫영성체 때 드리는 기도는 예수님이 반드시 꼭 들어주시니 소원을 한 가지씩 미리 생각해 두었다가 청하라고 일러주셨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거룩한 한밤중의 자시 미사에는 다시 소복을 차려입고 참례했다. 옛날의 자시 미사는 문자 그대로 밤 12시 자시에 맞춰서 거행되었다. 낮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미리 와서 가슴에다 조화를 달고 맨 앞줄의 무릎틀에 꿇어앉았다.

장엄한 성탄절의 축가가 오래된 성당 가득히 울려 퍼지고 드디어 제대 앞으로 나가 첫영성체를 하는 순서가 되었다. 간절하고 간곡한 기다림 끝에 처음 영해 보는 성체!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춥고 누추한 내 영혼의 집에 나자렛의 예수님이 찾아와주신 떨림이었다. 감사함이었다. 그때 나는 인성으로서의 예수님을 참 많이 사모했던 것 같다. 면병 속의 성체가 입속에서 녹아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을 내 안에다 붙잡아 놓고 얼마나 애절하게 간구했는지 모른다. “주님! 이젠 제가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네? 예수님! 그리고 영원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사랑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하고.







어려서부터 말이나 생각을 가슴 속에다 꼭꼭 묻어두는 말 없고 수줍은 애잔한 아이였던 나는 아버지를 여읜 그해 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한창 팔팔해야 할 청소년기에 기둥이나 벽에 몸을 기대지 않고서는 혼자서 똑바로 앉아있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갔다. 병명도 없이 탈진하여 책가방을 들고 도저히 학교에 다닐 기운조차 없어져서 결국에는 중학교 2학년 1학기를 간신히 마친 상태로 휴학했다.

그런 후로 일 년이 지나고도 다시 복학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집과 성당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이 길어지다 보니 의기소침해지고 딴 세상 사람들처럼 점점 거리가 멀어져만 가는 활달한 동급생들이 부러웠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교복을 입고 가슴에는 배지를 달고 책가방을 들고 등하교를 하는 여학생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아침저녁으로 성당에 꿇어앉아 간절하게 올린 기도를 주님이 들어주셨나 보다. 다음 해 신학기에는 복학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2년간이나 휴학한 관계로 동생과 같은 학년이 되었기에 집을 떠나서 기숙사가 있는 인근 도시의 여학교로 전학했다. 헌데 그 학교가 우연인지 아니면 예정된 필연이었는지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가톨릭 미션스쿨이었다.

그날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기숙사에서 보낸 5년 동안의 학창시절은 나의 전 신앙생활을 통틀어서도,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다감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가서의 신부처럼 오직 주님만이 나의 희망, 나의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애틋한 계절. 그때는 정말이지 주님을 그리워했다.



생의 자취를 돌아보건대 아주 엄격한 수녀님이 기숙사 사감이었던 중고등학교의 학창시절은 삶의 노정에서 그중 순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수녀들이 선생님인 학교. 교실과 도서관 어디를 가든지 십자고상과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분위기와 맑고도 절제된 환경이 주는 평화를 나는 탐닉했다.

기숙사 우리 방에서 보이는 창밖 정원의 작은 동굴 안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나는 이 석고 성모상을 가끔 아무도 모르게 깨끗이 물로 닦아서는 제자리에다 살며시 가져다 놓곤 했었다. 그렇게 작은 희생의 꽃다발을 주님께 바치곤 했다.

고통의 심연에서 다다른 피안처럼 언제나 숭고한 감수성으로 충만했던 모교의 캠퍼스는 다함 없는 신심의 세계로 내 영혼을 이끌어준 영성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모든 생각과 상념의 근원이 주님이었고 언행과 사고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자리했던 그곳은 힘겨운 인생길에서 가장 성스럽게 안배된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은총처럼 주어진 이 시기의 축복에 대해 나는 신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이다.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읽으며 치셤 친부에게 무한정 빠져들 수 있었던 감성의 바닷속. 타고르와 헤르만 헤세를 동경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바라다보이는 유난히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초월적인 세계를 몽상하였던 때. 칼릴 지브란과 칼 라너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심취하여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시기. 포켓 영한사전처럼 낡도록 들고 다니면서 읽고 또 읽고 묵상에 잠긴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은 신께로 가는 오솔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몸은 여전히 허약해서 시험 때만 되면 온 입술이 죄다 부르트고 앓아누웠다. 단 몇백 m 거리의 시장에 나갈 때조차 중간쯤에 한 번은 길가에 앉아서 쉬었다 가지 않으면 지탱할 수가 없었으니까. 남들처럼 밤을 꼬박 새워가며 공부를 한 번만이라도 실컷 해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후의 전 학창 생활을 통틀어서도 날밤을 지새우는 그런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예수님께로 향한 동경과 오롯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던 기숙사 생활은 아린 추억으로 남아있다.



대세를 받고 임종하신 아버지를 매개로 성당에 발을 내디딘 나의 입교는 우연찮게 마주쳐서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만 바람 같은 요식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 길에서 만난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의식의 중심부를 관통한 기호가 되었고 구도의 목적지였으며 운명적인 인생행로가 되었다. 삶의 질곡을 헤쳐 나오느라 메마르고 거칠게 변한 어떤 경우일지라도 이마에 새겨진 인호처럼 하느님의 이름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지워진 날은 결단코 단 한 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질긴 숙명의 끈이었기에? 성세성사를 통하여 되돌릴 수 없어진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쩌면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끈질긴 숙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젊었던 날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모든 사유의 중심이었던 예수라는 이름이 납덩이처럼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신앙의 휴지기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교리와 계명이 사슬처럼 여겨져서 짐스럽고 귀찮아져만 갔다.

꼭 지켜야만 되는 주일 미사에 대한 의무감도 고해성사의 부담도 나에게서 퇴색된 의미로 변질되어 갔으며 그럴수록 교회로부터 점점 멀리 분리되고 있었다. 어떠한 명제에도 결코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무신론적인 욕구. 그 어떤 개체로부터의 속박도 단연코 거부하고만 싶은 끝없는 자유에의 갈망!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거대한 초상으로부터 해방되어 훨훨 날아가고만 싶었던 자유를 나는 얼마나 꿈꾸고 추구하였던가.

그렇게 시초한 방황의 심리는 오랜 날들 동안 의식의 전 영역을 지배했다. 아마도 복잡다단하게 억압된 인위적인 요소로부터의 단절을 통해서 얻어질, 형이상학적인 자유를 나는 갈망했나 보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짝사랑의 구호가 되어 일방통행으로 그쳐버린 신을 향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전적으로 순수 영성의 소유자였던 아메리칸 인디언의 내적 세계에 빠져든 것이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연의 일부분처럼 인식된 단순한 그들 삶의 방식에 매료되었다. 그즈음부터 ‘우주를 떠다니는 선한 기운’에 대한 상념에 젖어들곤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란 것은 결국에는 우주를 떠다니는 선한 기의 총체와도 같은 것. 그로부터 파생되는 선한 에너지의 복합체가 바로 신의 본성이 아닐까 싶은. 그러니 나 또한 이 우주에 악한 기운이 아닌 선한 기운을 보태는 영혼이 되어야만 하리라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는 않았으나 관심법처럼 직관으로 통하는 본질에의 탐구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했다. 자격증도 없는 철학자처럼. 자연주의자 같은 담담한 자유를 위해 방황의 늪을 헤매었다. 이제 와 그것을 방황이라 규정하는 것은 그 길에서도 결코 영혼의 평화를 누리지는 못했으며 언제나 돌아가야 할 본향과도 같은 존재가 끊임없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 나 또한 그의 음성을 의식했으며 그의 품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그 점 때문이다.

신앙에 대한 나의 방황은 아직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 현재진행형이다. 주 예수! 그 이름 잊을 수는 없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가톨릭인으로서의 나의 주파수는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영혼은 한없이 암울하고 무미건조하다. 다만 베르나데트인 나에게 예수라는 의미는 결코 내려놓을 수가 없는 양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십자가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구도의 길은 인생사와 흡사하다. 삶의 무대에는 비바람치고 햇볕 드는 날이 공존하듯 신앙생활 역시 “내 주를 가까이”하는 뜨거운 한 때가 있는가 하면 얼음장같이 차가운 냉담의 터널을 통과해 가야만 한다. 살아보니 열정과 냉탕 사이를 오고 가는 신앙생활이 곧 인생사가 아닌가 싶어지니 말이다.

이제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수가 훨씬 짧아진 황혼의 길목에 서 있다. 새벽녘 길을 나선 해님이 온종일을 헉헉대며 달려가야만 닿는 거리. 그 하늘가 모서리에 토해내는 붉은 저녁노을은 하루살이 해님 인생의 고단한 한숨일 테지. 그 영역 어느 지점인가에 나 또한 당도해 있는 게 아닐까. 밟고 지나간 흔적들이 살아온 세월의 이력이 되고 있는 나이.

머지않은 날에 나는 이 세상에서의 순례를 마칠 것이다. 세상 모든 이치와 이성을 뛰어넘는 영역 그 너머에 계실 주님! 지금은 가려져서 희미하게 보이나 어둠의 장막이 걷히는 날, 그때에는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성탄절은 영세한지 만 55년이 되는 날이다. 반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그해의 성탄처럼 아주 오랜만에 자시 미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그날의 감회와 설렘을 재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탕아의 심정으로 오늘 밤의 자시 미사 참례를 준비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자리. 처음 주님을 영했던 자시미사 때의 그 간절한 기도 속으로 나는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사랑하게 해주세요. 예수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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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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