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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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의 아픔 달랜 해외 가톨릭교회의 따뜻한 손길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9) 가톨릭교회와 사회복지 ① 가톨릭 해외 원조 기구의 긴급 구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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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S가 대전교구 논산성당에 차린 급식소. 밀가루, 우유, 강냉이로 끓인 죽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 있다. 출처=「성재덕 신부」 서울 성가소비녀회 역사자료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가족도, 집도 잃은 피난민들에겐 당장 먹을 곳도, 잠잘 곳도 없었다. 하루하루 구호품으로 연명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피난민 마을에 어쩌다 구호물자를 실은 트럭이 들어올 때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누더기를 입고 얼굴에 땟국물 가득한 아이들은 미군이 탄 차량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기브 미 초코” “씨레이션”(깡통에 든 미군 전투식량)을 외쳤다. 미군들이 가끔 초콜릿과 깡통을 던져주면 아이들은 “땡큐”를 외치며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얻어 입은 옷과 모자 등엔 USA, ARMY와 같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1951년 8월 정부가 집계한 피난민은 380만 명, 집과 재산을 잃은 전재민(戰災民)은 402만 명으로 모두 782만 명에 달했다. 당시 남한 인구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해외 원조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외 원조 단체들은 전쟁 직후 국내에 진출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달랬다.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복지협의회(NCWC), 가톨릭구제회(CRS) 등을 비롯해 수도회들도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폐허 속에서도 응급 구호 사업, 고아원 운영, 주택 복구, 교육 및 보건 의료 사업 등이 활발히 진행됐다.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복지협의회(NCWC)는 1950년 8월 분유, 식품, 겨울옷, 구두, 의약품 등 구호물자를 남한에 즉각 보내왔다.

당시 주미 대사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요한, 1899~1966) 박사의 공이 컸다. 장면 박사는 1950년 7월 NCWC를 통해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한국을 위한 기도와 원조를 부탁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에 앞서 장면 박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남침 사실을 알리고, 피난민들을 위한 국제 사회의 도움을 호소했다.

“특히 피난민들은 의약품과 식량과 의류와 거처할 곳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천막 하나라도 그것은 훌륭한 집이 되어 긴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의류는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절실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예방약과 의약품의 공급이 필요합니다.”(장면, ‘세계만방에 호소한다’ , 6·25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연설 중에서)

▲ 조지 캐롤 몬시뇰(왼쪽)이 수도자들과 함께 구호물품을 살펴보고 있다. 출처=「일어나 가자!」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 90주년 사진집


세계 각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NCWC 산하 해외 원조 공식 기구인 가톨릭구제회(CRS)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CRS는 전쟁 전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었다. 평양교구에서 선교하던 미국 메리놀회 조지 캐롤 몬시뇰이 1946년 CRS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한국전쟁 발발 첫해인 1950년 미국 민간 구호 단체들이 한국에 보낸 280만 달러 가운데 200만 달러 이상을 CRS가 모금했다. 당시 미국 가톨릭교회는 매년 사순 시기 제4주일에는 한국전쟁 피해자들에게 보낼 기부금을 걷었고, 11월 추수감사절에는 구호 물품을 수집했다. 1953년 기부금 총액은 500만 달러에 달했다.

CRS 구호 사업의 물품은 전국 각지로 분배돼 한국민들 가운데 CRS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모인 물품 가운데 90가 양곡이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옥수수가루, 밀가루, 우윳가루는 학교 급식소와 전국의 무료 급식소 등으로 보내졌다. 각 성당에도 이러한 구호 물품이 전달됐는데, 신자들 위주로 나눠주다 보니 구호품을 얻기 위해 입교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었다.

“그런 구호품을 신자, 비신자 가려 나눠준다는 게 우스운 얘기지만 아무래도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에게 먼저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구호품을 더 탈 요량으로 믿음도 없이 입교해서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밀가루 신자’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CRS는 자체적으로 구호 활동을 벌이면서도 미국 정부, 한국 정부, 한국 가톨릭교회 각 교구와 긴밀히 협력했다. 조지 캐롤 몬시뇰 이외에도 CRS 대표 에드워드 스완스트롬 신부는 1951년 2월과 1952년 9월 한국을 찾은 뒤 미국으로 돌아가 미 전역에 도움을 호소했다. CRS는 한국 국방부에 군인과 그 가족을 위한 의류 964포대와 신발류 526포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미국 뉴욕대교구장이자 군종교구장이던 스펠만 추기경은 전쟁 중에도 매년 성탄 때면 한국을 찾아 성탄 미사를 봉헌했다. 또 미국에서 한국을 위한 구호 활동에 적극 나섰다. 스펠만 추기경은 1953년 12월 27일 뉴욕대교구 이름으로 한국 가톨릭교회 보육원을 위해 3만 5000달러를 기부했고, 군인 가족과 남편은 잃을 이들을 위해 집과 재봉틀을 제공했다.



한국과 미국 오가며 구호에 헌신… 아낌없이 베푼 삶



▨조지 캐롤(1906~1981) 몬시뇰



조지 캐롤 몬시뇰<사진>은 안(安) 제오르지오 몬시뇰, 캐롤 신부 등으로 불렸다. 한국 사회가 어려웠던 시기에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활동한 그는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전쟁과 가난에 굶주렸던 한국 국민을 위해 아낌없이 베푼 그의 삶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190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캐롤 몬시뇰은 1931년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그는 메리놀회 선교사로 한국땅을 밟았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듬해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한 그는 1946년 미국에서 CRS 한국지부장을 맡아 194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미군 명령으로 일본에 잠시 피신했던 그는 9ㆍ28 서울 수복을 계기로 미8군에 소속돼 유엔군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은 그는 중공군이 개입하자 UN군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특히 남쪽으로 피신하는 신자들을 위해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신원이 확실하니 남하하는 데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내용의 통행증 2000장을 밤을 새워 쓴 일화는 유명하다.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센병 환자를 위해 ‘성라자로요양원’(현 성라자로마을)을 설립했다. 또 종교를 뛰어넘어 활동하며 감리교와 함께 1952년 외국 민간 원조 기관 한국 연합회(KAVA)를 꾸리기도 했다. 그는 가톨릭을 내세우지도 구호 대상을 가톨릭 신자로만 한정 짓지도 않았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 종교나 자신이 속한 선교회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 중에도 부지런히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한국에 구호물자를 보내는 데 헌신했다.

캐롤 몬시뇰은 이 같은 공로로 1954년 대한민국 보사부 장관 표창, 1961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특별히 한국 순교자를 공경하며 한국과 한국 교회를 사랑했던 캐롤 몬시뇰은 1975년 미국으로 돌아갔고 1981년 뉴욕 메리놀회 본부에서 선종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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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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