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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가타리나(1818~1878)

피가타리나는 1866년 순교한 정의배(마르코)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이다. 그는 혼인한 뒤 서울 창동(현 서울시 중구 남창동)에 살다가 남대문 밖 자암(현 서울시 중구 봉래동ㆍ순화동ㆍ의주로)으로 이주했다. 그는 총명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기도문과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피가타리나는 오랫동안 홀아비로 살아오던 정의배와 1837년경 혼인했다. 그는 혼인한 뒤 남편과 동정을 지키기로 언약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ㆍ소재를 철저히 지켰다. 그는 많은 기도문을 외운 데다가 폭넓게 교리서를 익혀 가톨릭 교리에 아주 밝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비신자들을 권면하고 입교시키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피가타리나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했지만 남을 위한 선행에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좋지 않은 옷과 음식을 입고 먹었지만 헐벗은 교우들을 만나면 남몰래 자기 옷을 벗어 주었고,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 주었다. 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교우들을 늘 웃는 얼굴로 겸손하고 온순한 태도로 맞아주었다.

아울러 그는 선교사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특히 1859년 말에는 박해가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베르뇌 주교를 보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때 그는 자신의 창동 집을 남에게 맡기고 남편 정의배와 함께 주교 댁으로 가서 살았으며, 남대문 밖 자암에 작은 집을 사서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베르뇌 주교를 모셨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다블뤼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얼마 동안 자신의 집에 모셨다.

피가타리나는 1866년 병인박해로 선교사들과 남편이 체포돼 순교하자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숨어 지냈다. 그러면서도 순교하지 못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했고, 스스로 더욱 엄격하게 교리를 실천했다. 비신자의 집에 머물게 됐을 때도 그는 대재를 지키고 묵상과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축일표를 만들어 교우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그리고 성직자가 없어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것을 늘 서럽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1877년 9월 24일 리델 주교가 조선에 다시 입국해 서울에 도착하자, 주교를 도우면서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이듬해 1월 28일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됐다. 피가타리나도 이 무렵 자신의 집에 함께 살았던 조카 피영록(바오로)의 밀고로 체포됐다.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피가타리나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선교사들의 거처를 진술하지 않은 탓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참된 천주교를 봉행하는 사람인데,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면서 “예수 마리아”만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 결과 피가타리나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도 교우들을 권면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1878년 3월 17일 장티푸스까지 걸린 그는 형벌로 인한 장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옥사했다. 리델 주교가 우포도청에서 좌포도청으로 이감되기 이틀 전이었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피가타리나의 행적은 「좌우포도청등록」과 「병인치명사적」 그리고 리델 주교의 「나의 서울 감옥생활」에 기록돼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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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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