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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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 번 방호복 갈아입고 틈틈이 기도하며 환자 돌봐

42일간 대구·경주에서 코로나19 환자 위해 봉사한 박영혜 수녀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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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ㆍ경북 지역에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3월 초, 차를 몰고 대구ㆍ경북 지역의 확진자들을 돌보러 달려간 수도자가 있다.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팀장 박영혜(마리 빅토리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다. 그는 생활치료센터였던 대구대교구 한티 피정의 집과 경주 농협연수원에서 42일간 확진자들을 돌봤다.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사순과 부활을 맞은 박 수녀를 6일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났다. 경주에서 돌아온 후 자가격리 15일이 지난 후였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 42일간 80여 벌이 넘는 방호복을 갈아입으며 확진자들을 만난 박영혜 수녀. 박영혜 수녀 제공

 

 

 

 

 
▲ 42일간 80여 벌이 넘는 방호복을 갈아입으며 확진자들을 만난 박영혜 수녀. 박영혜 수녀 제공

 

 

 


“이렇게 밖으로 떠들 일이 아닌데…. 어차피 이런 일이 생기면 누군가는 해야 하고, 간호수녀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에요. 저 같은 사람은 가족이 있는 사람보다 움직이기 쉽잖아요.”



너무 많은 기도와 칭찬에 감사

박 수녀를 만나기 전,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건 횟수가 10번이 넘었다. 통화 중이거나 통화 연결음이 들리는가 싶으면 끊어지기 일쑤였다. 어렵게 만난 박 수녀는 “그동안 너무 많은 기도와 칭찬을 받아 하늘에서 받을 게 없을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하루에 두 벌씩, 박 수녀는 80여 벌의 방호복을 갈아입으며 확진자들을 만났다. 3월 6일, 고속도로를 달리며 지정받은 생활치료센터가 한티 피정의 집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으로, 을해년(1815년)와 정해년(1827년)를 전후해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촌이었다. 대구대교구는 생활치료센터로 한티 피정의 집(관장 여영환 신부)을 제공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코로나19 의료 지원을 희망한 사람은 박 수녀를 비롯해 의사ㆍ간호사 총 6명이었다.

“한티에 도착하니 대구시 공무원들이 컴퓨터 세팅을 하고, 와이파이를 설치하고 있더라고요. 한티가 수도자 입장에서는 좋은 곳이었지만 환자들 편의를 위해 설치할 게 많았어요. 오후부터 대형버스 4대에 나눠 탄 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코로나19 경증 확진자의 격리 치료를 위한 시설인 만큼 중증 확진자는 없었다. 정원은 70명으로, 보통 2~3주는 지나야 퇴소를 했다. 대부분 10~40대 연령층으로,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코로나 양성 환자들이 개별적으로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대구 신천지 교인들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했죠. 많은 분이 신천지 교인들이었어요.”

박 수녀가 잠시 침묵했다. “사실 이분들을 돌봐드리며 생각이 많았습니다. 연세 드신 분이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어요. ‘신천지 교인들이 우리 교회 피정의 집에서 치유를 받는 게 하느님의 큰 뜻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천지 교인 돌보며 반성과 미안한 마음

박 수녀는 “그 조그만 독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한 달 가까이 사는데 젊은이들이 순하고 착했다”면서 “사실 좀 반성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 많은 사람이 신천지로 갔던 건 우리가 잘 안아주지 못해서 아닌가 싶었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신천지 교인들은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접근한다면서요. 성당에 가면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내 탓이 크겠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박 수녀는 경증 확진자들이 자가면역으로 음성이 나올 때까지 격리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수시로 열을 검사하고 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으로 보냈다. 신체 변화를 검사하고, 지병이 나빠지지 않는지, 홀로 방에서 생활하며 심리적으로 힘들지는 않은지 수시로 확인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군인과 방역업체 직원, 경찰들에게 감염 예방을 위한 수칙과 방호복 탈의법을 교육하는 것도 박 수녀의 몫이었다. 하루에 12시간씩 근무했다.

그가 수녀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 수녀는 회의 때만 수도복을 입고, 확진자들을 만날 때는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박 수녀는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홀로 기도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청소년들의 수호성인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에게 전구를 청했다. 알로이시오 성인은 중세시대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뉴스에서 마스크가 모자란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는데, 한티에는 마스크가 부족하지 않았어요. 도시락 차가 끼니때마다 들어오고, 후원 물품도 계속 들어왔습니다. 모자라지 않고 넘쳤습니다.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한 것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이 참 좋다는 걸 느꼈어요.”

박 수녀는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로 “간호사인 내게 이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미리 알리지 않고, 센터에서 소식을 전했는데 동생들은 “역시,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해” 하고 응원해줬다.

“간호사인 제게는 그냥 하는 일이에요. 다들 전염병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잖아요. 환자들은 의료진을 믿으면 되고, 행여나 잘못돼서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을 믿고 사는 거죠.”

고려대 대학원에서 통일 보건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 수녀는 처음에는 보름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학원을 휴학했다. 한티가 3월 31일 생활치료센터로 문을 닫았지만, 경주 생활치료센터에 관리자가 없다는 소식에 경주로 자리를 옮겨 확진자들을 돌봤다.

생활치료센터가 곧 선교 현장

박 수녀는 “선교 현장에 직접 있지는 않았지만, 생활치료센터가 곧 선교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평소와는 다른, 격리된 채 살았던 사순과 부활이었지만 그는 간호사로서 환자를 만난 똑같은 일상이었다고 했다. 그는 음성 판정을 받고 기쁘게 돌아가는 환자와 계속 양성 판정이 나와 낙담하는 환자들 사이에서 필요한 손길을 건넸다.

가톨릭대 간호대학 출신인 박 수녀는 호스피스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수도원에 입회했다. 1994년 입회한 후 30년 넘게 간호사 수녀로 살았다. 2019년에는 인도적 대북 의료지원에 헌신한 공로로 국무총리상을 받았던 그는 대구의 확진자 곁을 떠났지만, 그의 마음은 북한에 가 있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는데…. 이렇게 희생을 당하는 분들은 늘 가난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에요. 코로나19로 힘들어하고 있을 북한 주민들이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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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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