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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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의 가르침 오롯이 실천한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수덕자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 권철신과 이기양이 지은 홍유한 제문의 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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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은 유고에 수록된 권철신이 쓴 홍유한 선생 제문의 전문. 중간에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칠극」의 덕목에 맞춰서 농은 선생의 생애를 회고한 대목이다.



농은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 30대 초반이던 1757년 천주교 교리서를 처음 접한 뒤 서학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특별히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은 「칠극(七克)」이었다. 스승 성호 이익의 인가도 있었지만, 진리를 담은 층층의 가르침이 내면에서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을 바탕으로 수계 생활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는 「직방외기」와 「천주실의」 같은 책도 구해서 읽었다. 「직방외기」 서문을 독특한 필치로 베껴 써둔 친필이 남아있다.

조선 천주교회는 1784년 초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785년 3월에는 명례방에서 푸른 두건을 쓰고 얼굴에 분을 바른 이벽이 미사를 집전하다가, 노름판이 벌어진 것으로 착각한 순라꾼의 급습으로 천주교 집회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유한은 그 일이 있기 두 달 전인 1785년 1월에 세상을 떴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 교회 창립에 대해 쓴 제17신에서 “이때 홍유한이라는 선비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가톨릭교회의 서적과 행적을 연구하여,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의 예에 따라 천주님을 공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천주교회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랐던 것입니다.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지킬 정도였습니다”라고 그의 초보적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 농은 홍유한 선생 묘지가 있는 우곡성지(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에 있는 홍유한 선생의 동상. 손에는 「칠극」이 들려있다. 우곡성지 황영화 신부 제공



칠극의 7죄종 극복하는 덕목과 정확히 일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은 홍유한 누님의 사위였고,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홍유한이 세상을 뜨자 그를 위해 제문을 지었다. 이기양(李基讓, 1744~1802)도 같은 남인으로 역시 제문을 지어 보냈다. 「풍산세승(豊山世乘)」 제10책에 수록된 홍유한의 제문과 만시는 당시 내로라하던 남인 학자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특별히 두 사람의 제문이 눈길을 끄는 것은 제문에서 한결같이 홍유한의 일생 행적을 「칠극」의 7가지 죄악을 이기는 7덕목에 대응시켜 설명한 점이다.

권철신은 서두에서 자신과 홍유한이 성호 이익의 제자로 동문의 우의가 있었고, 그를 사모하여 온 집안을 이끌고 가서 그를 좇으려 했었다고 말했다. 권철신은 “공께서 대월(對越)의 공부에 잠심하여 이미 그 사사로움을 능히 다 없앤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른 바 지나치다고 했던 것은 나의 아집을 지닌 견해로 공의 사사로움 없는 마음을 가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잠심대월(潛心對越)’은 주자가 「경재잠(敬齋箴)」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지내면서, 상제(上帝)를 마주해 찬양하라(潛心以居, 對越上帝)”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상제 즉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대월(對越)’이란 표현을 썼다. 권철신은 홍유한의 행동에서 지나친 점을 느꼈는데, 그것이 실은 그의 신앙심에서 나온 것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쓴 것이다.

권철신이 지적한 홍유한의 지나침은 그 명목이 이러하다. 구분의 편의상 번호를 붙였다. “아! 공께서 [1] 식사하실 때는 반드시 그 절반을 더셨고, 어쩌다 맛난 음식과 만나면 더더욱 그 즐김을 절제하였습니다. 덜어내고 줄이기를 지극히 하여 피부에 윤기가 나지 않았으니, 저는 공께서 음식을 절제함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2] 젊어서부터 내실에서 지내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었고, 서른 살 이후로는 다시는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았으므로, 저는 공께서 여색을 절제함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3] 몸에 고질이 있어, 기거가 몹시 힘들었는데도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니고는 일찍이 기대거나 눕지 않으셨으니, 저는 공께서 자신을 규율함이 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 뜻하지 않게 나쁜 일이 생겨도 조용히 즐겁게 받아들여, 남을 비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바르다고 변명하지도 않았으니, 저는 공께서 머금어 참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5]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마루 아래에서 절을 올리면 반드시 몸을 움직여서 답례하였고, 평소에 말을 쉽게 하지 않아 일찍이 몸으로 맹세하지 않았으니, 저는 공이 겸손을 고집함이 과하다고 여겼습니다. [6] 길을 가다가 늙고 병든 이와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에게 주고는, 백리의 불볕더위 길을 아픈 몸을 무릅쓰고 걸어갔으니, 저는 공께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嗚呼! 公當食, 必舍其半, 若遇美味, 尤節其嗜. 省減之極, 肥膚不豊, 則小子以公之節食爲過矣. 自少處內絶稀, 三十以後, 不復生育, 則小子以公之節色爲過矣. 身有痼疾, 起居甚難, 而非就寢, 未嘗?臥, 則小子以公之律己爲過矣. 非意橫逆, 恬然樂受, 恥發人非, 不辨己直, 則小子以公之含忍爲過矣. 下賤堂下之拜, 必動身而答之. 平常不易言, 未嘗以身爲質, 則小子以公之執謙爲過矣. 道遇老病, 下馬授之, 百里炎程, 力疾徒步, 則小子以公之施人爲過矣.)

권철신은 홍유한의 과도한 점을 여섯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는 절식(節食), 둘째가 절색(節色), 셋째는 율기(律己), 넷째는 함인(含忍), 다섯째가 집겸(執謙), 여섯째는 시인(施人)이다. 이 여섯 가지는 「칠극(七克)」의 7죄종(罪宗)을 극복하는 덕목과 정확히 맞대응 된다.

첫째, 음식에 대한 절제는 「칠극」 ‘색도(塞)’ 곧 탐욕스레 먹는 것을 막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둘째, 절색은 ‘방음(坊淫)’, 즉 음란함을 막는 것과 호응한다. 셋째, 자기 규율은 ‘책태(策怠)’, 게으름에 대한 채찍질과 맞통한다. 넷째, 함인은 ‘식분(熄忿)’에 연결되니 인내로 분노를 가라앉히라는 것이다. 다섯째, 집겸은 ‘복오(伏傲)’ 즉 교만을 눌러 겸손하라는 가르침과 같다. 여섯째, 시인(施人)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해탐(解貪)’, 곧 탐욕을 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남은 것은 ‘평투(平妬)’ 뿐이다. 질투를 가라앉히라는 말이다. 홍유한 본인에게는 애초에 해당할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굳이 일곱 가지로 나열하지 않은 것은 「칠극」과의 연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곱 가지 죄종(罪宗)을 극복하는 일곱 덕목 중에 권철신은 여섯 조목을 대응시켜, 홍유한의 삶이 「칠극」의 가르침을 오롯이 실천에 옮긴 역정이었음을 설명했다.



칠극 바탕으로 수덕의 삶 실천한 농은

이기양은 아들 이총억이 주어사 공부 모임과 명례방 모임에 참석했던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안정복과 크게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이기양이 쓴 홍유한 제문의 한 대목은 이렇다.

“아! [1]식욕과 [2]색욕은 사람이 크게 욕망하는 바이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에게 있어 담박하기가 고목과 같았고, 막아 억제함은 원수와 적을 대하듯 했다. [3]해침과 [4]요구함은 사람이 누구나 병통으로 여기는 바이다. 하지만 선생은 남에 대해 혹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아껴 보호하였고, 능히 하지 못하는 듯이 베풀어 주었다. 치우치기 쉬운 것이 [5]오만인데, 선생은 스스로를 볼 때 언제나 남과 어울리기에 부족한 듯이 한 사람이다. 가라앉히기 어려운 것이 [6]분노이지만, 선생은 남을 살핌에 있어, 항상 어디를 가든 덕이 아님이 없는 것처럼 한 분이다. 잠시 동안은 능해도 오래가는 이가 드문 것은 [7]게으름이 틈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세상에 사는 60년 동안 여기에 한결같아서 줄을 그은 것처럼 반듯하였다.” (嗚呼! 食色, 人之所大欲也. 而先生之於身, 淡泊如枯木, 防制如仇敵. ?求, 人之所同病也, 而先生之於人, 愛護如恐傷, 施與如不克. 易?者傲也, 而先生自視, 常如無足以齒人者. 難平者怒也, 而先生視人, 常如無往而非德者. 能於暫而鮮於久者, 惰乘之也. 而先生之於生世六十年, 一於是而如畵也.)

편의상 번호를 매겼는데, 이 일곱 가지 또한 「칠극」의 7죄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글 끝에서 이기양은 ‘겸손[謙]’이란 한 글자가 공이 평생 수용한 것이라면서, “진실로 도가 존재한다면, 또한 그 사람이 죽고 살고가 무엇이 안타깝겠는가?”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요컨대 권철신과 이기양 두 사람은 홍유한의 삶이 「칠극」을 바탕으로 욕망과 죄악을 몰아내는 수덕(修德)의 삶 그 자체였고, 그가 사실은 천주교의 참 신앙을 실천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 글을 쓴 1785년 즈음은 천주교 신앙이 조선 땅에서 꿈틀하며 태동의 몸짓을 이어가던 때였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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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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