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북녘에 보낸 쌀과 옥수수… 민족 화해 위한 초월적 사랑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7) 한국 교회의 대북 지원 사업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995년 7월 31일, 북한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583㎜에 달하는 폭우가 8월 18일까지 북한 전역에 내려 막대한 인적ㆍ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 비로 사망ㆍ실종자 68명, 수재민 520만 명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땅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고 수확을 앞둔 곡식이 유실됐다. 1993년 흉작과 1994년 냉해에 이은 수해였기에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국, 북한은 국제 사회에 수재 복구 지원을 공식 요청했고,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이하 서울 민화위)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대북 지원 활동이 전개됐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설립

“광복 50주년을 맞는 1995년에 북한 신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북한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북한에 수해가 발생하기 몇 개월 전,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한 언론 매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공식 방북 의사를 밝혔다.

서울대교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교회의 노력을 가시화하고자 그해 3월 1일 최창무 주교를 위원장으로 한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했다. 그후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매주 화요일 민족 화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해 오고 있다.

북한 수해 발생 몇 달 전부터 민족 화해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기에 서울대교구는 북한 수재민 지원 사업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북한 수해 직후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북한에 첫 지원금 8000만 원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했다. 한국 교회의 본격적인 대북 지원 사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이후 서울 민화위와 조선천주교인협회는 그 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1996년 4월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 통일 기원 미사’를 동시에 봉헌하는 등 화해와 교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서울 민화위는 대북 식량 지원을 지속하기 위해 1996년 8월부터 ‘사랑의 국수 나누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평양 국수 공장 건립(1996년), 북한 동포를 위한 국제 단식 모금 운동(1997년), 북녘 형제 돕기 국수 나누기 운동(1998∼2000년), 겨울옷 보내기 운동(1998년) 등을 꾸준히 펼쳤다.



한국 교회의 대북 지원 활동

굶어 죽어가는 북녘 형제들의 소식에 한국 교회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국제 카리타스 로마 본부와 연계, 대북 지원 기금을 조성해 1995년 7600만 원, 1996년 5억 3500만 원을 대한적십자사와 국제 카리타스 홍콩지부를 통해 북한에 지원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모금한 대북 지원금으로 1996년 홍콩 카리타스를 통해 북한에 총 44만 7000달러 상당의 쌀을 지원했다.

주교회의는 민족 화해와 대북 지원 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97년 10월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를 주교회의 공식기구로 설치했다. 주교회의는 1999년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꾸고, 전국 각 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수도회 등이 참여하는 ‘민족화해 가톨릭네트워크’를 결성해 효율적인 남북 교류 및 대북 지원 사업을 위한 제도적 틀을 갖췄다.

인도적 식량 지원이 이어졌지만, 북한의 식량난은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북한은 1993년 쌀 356만톤, 옥수수 394만톤을 생산했지만, 수해가 발생한 1995년에는 쌀 140만톤, 옥수수 137만톤으로 생산량이 급감했다. 극심한 식량난이 이어지자 북한 당국은 위기를 극복하자며 ‘고난의 행군(1996~2000년)’이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굶주림을 버텨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1996년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쌀과 옥수수를 합쳐도 181톤에 불과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 수는 명확하지 않지만, 2010년 11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3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1997년 탈북한 노동당 최고 간부 출신의 황장엽씨는 “1995년 50만 명, 1996년 11월까지 100만 명이 아사했다”고 밝히며 “이 상황대로 간다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의 아사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북한의 식량난처럼 남북 교류와 대북 지원 사업은 쉽사리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국민은 물론 신자들 사이에도 “북한의 지도부가 회개하지 않는데 우리가 북한에 막 퍼주어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1997년 국제 통화 기금(IMF)을 받으며 국내 경기 사정이 악화하며 대북 지원 열기도 급속히 식어갔다.

좁혀지지 않는 남북의 거리

한국 교회는 북한에 지극 정성을 쏟았다. ‘퍼주기식 지원’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식량 지원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주교회의와 각 교구 민화위, 남녀 수도회의 헌신은 눈물겨웠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7년 3월 6대 종단 및 시민 단체와 함께 ‘북한 동포에게 옥수수 10만톤 보내기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 교회의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을 쉽사리 받아주지 않았고, 김 추기경은 그런 북한에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좀 섭섭하다. 상대편이 우리 마음을 제대로 받아 주질 않는 것 같다. 인적 교류건 물적 지원이건 일회성에 그친다. 설령 다음에 만나 좀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해도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다. 도무지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아직도 높기만 한 분단의 벽을 실감한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남북의 진정한 일치는 신앙적 희생을 밑거름으로 한 초월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빈부 갈등, 이념 갈등, 세대 갈등으로 갈라져 있다. 사회 분열이 끊이지 않는 것도 상대편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 반세기 넘게 다른 이념과 체제에서 살아온 북녘 동포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통일을 원한다면 주위의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통일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우리끼리 먼저 화해하고 일치해야 한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5-2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5

집회 2장 15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길을 지킨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