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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년 겨울 언 샘물에 세수하고 서학을 공부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 주어사 강학회의 공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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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철신은 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제자들과 열흘 넘게 합숙 생활을 해가며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모임을 주관했다. 사진은 주어사 터.



두 번 갖지 못할 성대한 자리

다산이 환갑을 맞아 지은 6편의 묘지명은 자신을 포함하여 천주교 문제로 죽은 이가환, 권철신, 이기양, 정약전, 오석충 등 여섯 사람이 사실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음을 밝히자고 쓴 글이다. 그랬던 것이 「조선천주교회사」에 인용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는 기술 내용이 자못 달라졌다. 그 달라진 부분을 겹쳐서 보면, 바뀐 다산의 생각과 다산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지점이 보인다. 이번 글은 이 점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권철신에 대해 쓴 「녹암묘지명(鹿菴墓誌銘)」을 보자. “선형(先兄) 정약전이 폐백을 들고 권철신 공을 스승으로 섬겼다. 예전 기해년(1779) 겨울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하였는데, 눈 속에 이벽이 한밤중에 도착해 등촉을 밝혀 경전을 담론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비방이 생겨났으니, 이것은 이른바 성대한 자리는 두 번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先兄若銓, 執贄以事公.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走魚寺,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 其後七年而謗生, 此所謂盛筵難再也.)”

다산은 천주교와 관련된 기술을 할 때는 극도로 몸을 사리고 말을 아꼈다. 그럴수록 행간을 잘 살펴야 한다. 강학 장소로 천진암과 주어사 두 곳을 특정했는데,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주어사만 말했다. 실제 1779년 겨울의 강학 장소는 천진암이 아닌 주어사라야 맞다. 천진암을 앞에 넣은 것은 이벽이 천진암을 거쳐서 주어사로 넘어온 것을 확인키 위해서다. 「선중씨묘지명」에는 이벽이 안 나오므로 주어사만 말했다. 이들은 근 열흘간 밤새 등불을 밝혀가며 ‘담경(談經)’했다.

그런데 막상 담론의 구체적 내용은 한마디도 없이, 불쑥 7년 뒤에 일어난 비방으로 문맥이 건너뛴다. 중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내용이 잘려나갔다. 7년 뒤는 1785년으로, 바로 명례방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청건(靑巾)을 쓴 이벽의 주재로 미사를 드리다가 순라군에게 적발된 추조(秋曹) 적발 사건을 가리킨다. 주어사에서 열흘간 밤새 경전을 두고 담론했는데, 7년 뒤 똑같은 멤버들이 함께한 자리로 문제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당시 주어사에서 이들이 읽었던 경전이 유가 경전만이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때의 모임을 ‘성연(盛筵)’ 즉 두 번 다시 없었던 성대한 자리라고까지 표현했다.



잠심하여 지내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라

「선중씨묘지명」의 기술로 옮겨가 보자. “둘째 형님이 일찍이 겨울에 주어사에서 머물며 강학하였다. 모인 사람은 김원성(金源星), 권상학(權相學), 이총억(李寵億) 등 몇 사람이었다. 권철신이 직접 규정을 주어, 새벽에 일어나면 언 샘물을 움켜 세수하고 양치한 뒤 「숙야잠(夙夜箴)」을 외우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외우며,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우고, 저물녘엔 「서명(西銘)」을 외우게 했다. 장엄하면서도 공경스러워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때 이승훈(李承薰) 또한 담금질해 연마하여 스스로 굳세어져서, 서쪽 교외에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였다. 심유(沈)를 빈(賓)으로 삼았는데 모인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嘗於冬月, 寓居走魚寺講學, 會者金源星ㆍ權相學ㆍ李寵億等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泉漱, 誦夙夜箴, 日出誦敬齋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 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礪自, 就西郊行鄕射禮, 沈爲賓, 會者百餘人.)”

이들은 송나라 때 유학자인 진백(陳栢)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과 주자의 「경재잠」과 「사물잠」, 그리고 장재(張載)의 「서명」을 일과에 따라 함께 외우며 마음 자세를 다잡았다. 물론 이것은 공부의 마음가짐을 가다듬기 위한 암송이었고, 이들이 토론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이 읽었다는 글도 행간을 따져보면 묘한 구석이 많았다.

「숙흥야매잠」에는 “이 마음을 이끌되, 돋는 해와 같이 밝게. 엄숙하고 단정하며, 마음 비워 고요하게(提此心, 如出日. 嚴肅整齊, 虛明靜一)”라 했고, 「경재잠」은 “의관을 바로 하고, 우러러 높이 보며, 잠심하여 지내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로 글이 시작된다. 그런가 하면 하루를 마치며 외는 「서명」은 “부귀와 복과 은택, 내 삶 풍요롭게 하고, 빈천과 근심 걱정, 날 귀하게 하심이라. 살아선 내 순종해 섬기고, 죽어선 나 편안하리(富貴福澤, 將厚吾之生也. 貧賤憂戚, 庸玉汝于成也. 存吾順事, 沒吾寧也)”로 끝이 난다. 유가의 글임에도 그 내용이 범상치가 않다.

여기서도 이들이 읽었다는 경전 공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승훈의 대목에서 내용 한 단락이 또 건너뛴다.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은 주어사 강학에는 참석하지도 않았다. 문맥상 이 대목은 돌출하여 툭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실제 이승훈이 참여한 향사례는 이보다 1년 전인 1778년 연말쯤에 열렸다. 주어사 모임과는 성격도 전혀 달랐다. 하지만 다산은 주어사에서 강학한 사람들의 공부와 이승훈의 향사례를 나란히 병치시켜 둘 사이에 연속성을 부여하려 했다. 이들도 공부했지만, 이승훈도 노력했다. 그리고 7년 뒤에 이들의 공부는 비방을 불러왔다. 이렇게 연결지으려 한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공부했던가?



「천주실의」, 「영언여작」, 「칠극」을 읽다


다산은 그 답에 대해 6편의 묘지명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했다. 그런데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 속에 보이는 기술은 이것과 명백히 다르다. 내용이 너무 길어 건너뛰며 읽는다. “연구회는 10여 일이 걸렸다. 그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했다. 예전 학자들의 의견을 모두 끌어내어 하나하나 토의했다. 그다음으로 성현들의 윤리서를 연구했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주의를 집중시켰다. (중략) 중국에서 들여온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서도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 (중략)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했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하였다.”

이 대목은 명백하게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끌어온 인용이다. 열흘간의 강학회는 옛 성현의 경전과 윤리서에 대한 토론을 거쳐, 서양 선교사들이 쓴 초보적 종교개론서의 검토로 넘어갔다. 읽은 책은 첫째,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둘째,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셋째, ‘칠죄종(七罪宗)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을 다룬 책이었다.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첫째는 「천주실의」, 둘째는 「영언여작」, 셋째가 「칠극」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결국 이 세 권의 교리서를 열흘간 강학회의 귀결처로 삼아 등불을 밝혀 놓고 공부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이렇게 기술된다. “이들은 그 즉시 새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뒤에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비록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초보적 종교의 단계로 진입하는 발판이 열흘간의 집중 학습을 통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 대목의 기술이 홍유한의 수덕 생활을 묘사한 대목과 비슷한 것도 흥미롭다.

1775년 홍유한이 영남으로 거주지를 옮길 때, 권철신과 그의 아우 권제신(앞서 권철신의 편지에서 야능(也能)으로 불린 인물이 바로 그다), 그리고 이기양 등은 함께 영남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학문 결사를 구성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이 꼬이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젊은 시절 「칠극」 등의 책을 읽다가 한껏 고무되어 이같은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학문과 신앙의 공동체를 꾸려나가려던 꿈이 주어사의 강학으로 이어졌다.

권철신은 홍유한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도 해묵은 언약을 기억하여, 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제자들과 열흘 넘게 합숙 생활을 해가며,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모임을 주관했다. 이제 와서 그 희미한 꿈의 자락을 자세히 붙들 길이 없는 것은 안타깝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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