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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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왜 천주교 관련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을까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 감추고 지운 다산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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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 ‘백가보’에 실린 오석충(사진 왼쪽)과 이윤하 족보 단자. 양쪽 모두에 오석충의 둘째 딸이 이경도의 아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온다.



다산의 자기 검열과 왜곡된 진실

「조선복음전래사」와 비전 묘지명 6편의 예를 통해 보았듯, 천주교에 관한 한 다산의 모든 기록은 문면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에 관한 언급만큼은 철저한 자기 검열을 거쳤다. 검열의 방법은 아예 입을 다물거나 말꼬리를 흐렸고, 그도 아니면 사실을 왜곡해 말 허리를 자르지 않으면, 다른 사실을 덧대 해당 사안이 묻히게 했다.

오석충(吳錫忠, 1742?~1806)은 다산이 「매장묘지명(梅丈墓誌銘)」에서 자기 입으로 자신과 가장 친하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매달 월급을 받으면 가난한 그를 위해 두 말 곡식을 보냈고, 장마철이나 한겨울에는 그가 사는 매동(梅洞)으로 나무 한 짐씩을 사서 보냈다. 매동은 지금의 경복궁 영추문 밖 통의동 일대를 가리킨다. 다산은 손금 보듯 그의 형편을 잘 알았다. 강진 유배지에서 오석충이 유배 가 있던 임자도에까지 두 꿰미의 돈을 보냈을 정도였다.

그런 다산이 「오석충묘지명」에서 “공은 딸 하나가 있는데 권상문의 아내가 되어, 아들 둘을 낳았다(公有一女, 爲權相問妻, 産二子)”고 썼다. 오석충이 무남독녀 외동딸을 두었고, 그 딸은 권철신이 동생 권일신에게서 입양한 아들 복자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 1768~1802)의 아내였다는 뜻이다.

오석충의 자식이 딸 하나뿐이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전혀 사실이 아니다. 1801년 3월 6일 의금부에서 열린 공초에서 심문관이 오석충에게 딸과 사위에 대해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 이랬다. “딸이 둘 있는데, 하나는 권철신의 며느리이고, 하나는 이성구(李聖求, 1584~1644)의 봉사손(奉祀孫)의 며느리입니다.(女有二人, 一則權哲身之子婦, 一則李聖求之奉祀孫婦矣.)” 다산은 묘지명에서 있는 사실을 왜곡했던 것이다.

오석충에게는 실제로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은 다산의 말대로 권상문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이성구의 봉사손의 며느리였다. 그녀는 “매동댁(梅洞宅)”으로 불렸다. 그 내용은 현재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백가보(百家譜)」에 소상하게 나온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는 「천주실의」를 처음 가져온 지봉 이수광의 아들이고, 그의 봉사손은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1757~1793)이니, 둘째 딸의 남편은 이윤하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이 누구였길래, 다산은 애써 그의 존재를 지우려 했을까? 순교 복자 이경도(李景陶, 가롤로, 1780~1801)가 바로 그다. 이윤하는 성호 이익의 사위 이극성(李克誠)에게 양자로 들어가 이성구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 되었다. 이윤하는 권철신의 누이에게 장가들었다. 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이경도가 바로 오석충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오석충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다산이 이같은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다산은 엄정해야 할 묘지명의 정보를 비틀어, 오석충은 딸이 하나뿐이었다고 말해, 둘째 딸의 존재 자체를 기록에서 지워버렸다. 이경도 가롤로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배교를 거부하다가 이듬해 순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똑같이 순교한 권상문은 어째서 기록에 남겨 두었을까? 다산은 「녹암묘지명」에서 권상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상문 또한 신유년에 죽었다. 아들 황(愰)과 경(憬)이 있다. 권철신 공은 딸 하나가 있었는데, 이총억에게 시집갔다.” 권상문의 사망 이유가 순교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가 오석충의 맏딸이란 사실도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는 말꼬리를 흐린 것이다.



이윤하 마태오와 자녀들의 신앙

한편 이윤하는 다산이 「선중씨 묘지명」에서 형 정약전이 “이윤하와 이승훈, 김원성 등과 정하여 석교(石交)가 되었다”고 썼던 인물이다. 그는 성호 이익의 외손자인 데다 이성구의 봉사손으로 당당한 명문가의 종손이었다. 또한, 1785년 명례방 추조적발 당시 권일신과 함께 형조로 들어가 성상(聖像) 회수를 요청했던 5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20대 초에 이승훈, 정약전, 김원성 등과 어울려 천주교를 믿었다. 김원성은 또 이윤하의 이질 사위이기도 했다.

이재기(李在璣)가 쓴 「눌암기략(訥菴記略)」에 이윤하에 대한 기사가 몇 군데 나온다. 이재기는 이윤하와 좋게 지내던 사이였다. 이재기는 이윤하가 “권철신에게 그르친 바 되어 서학서에 빠졌다”고 썼다. 또 “이기성(李基誠)의 무리와 함께 형조에 들어가는 통에 세상의 지목을 받았다”는 말도 보인다. 이기성은 이기양의 동생이다. 이윤하가 이기성 등과 1785년 을사추조 적발 당시 성상을 돌려받기 위해 형조로 들어가 시위하다가 세상의 구설에 올랐다고 말한 내용이다. 관련된 다른 언급이 또 더 있다.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도 명례방 모임에 참석했고, 형조 항의 시위에도 동참한 사실이 이를 통해 밝혀지는 셈이다.

이재기는 이윤하를 볼 때마다 서학을 멀리하라고 충고했다. 한번은 이재기를 만나자, 이윤하가 이재기의 입을 막으려고 “내가 요새는 서학책을 읽지 않는다네” 하고 미리 선수를 쳤다. 그러자 이재기가 “그런데 세상에서 자네를 비방하는 것이 전과 다름없으니 어찌 된 셈인가? 이제부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서학서가 나쁘다고 배척하게. 그러면 비방을 늦출 수 있을 게야”라고 했다. 이때 이윤하의 대답이 이랬다. “내 마음으로 그것이 그른 줄을 모르겠는데, 입만 가지고 배척한다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윤하는 속속들이 천주학을 믿은 신심 깊은 신앙인이었다.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과는 친척이었고 같은 동네 친구이기도 했다. 이승훈의 외조부 이용휴는 이윤하의 외조부인 이익의 종질이었다. 이윤하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아버지의 신앙의 표본을 따라 자녀들 또한 신심이 깊고 두터웠다. 장녀는 홍유한의 집안인 홍갑영(洪甲榮)에게 출가했다. 장남은 이경도 가롤로, 차녀는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1782~1801), 차남은 이경중(李景重), 3남은 이경언(李景彦, 바오로, 1792-1827)이니, 자식 다섯 중 셋이 복자품에 오른 순교자 집안이다.



족보에서 지워진 이름들


이윤하는 1791년 진산 사건이 있고 나서 두 해 뒤인 1793년에 세상을 떴다. 37세의 젊은 나이였다. 신유박해 때까지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도 순교의 길에 섰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진지했던 신심 생활마저 잊혀 묻히고 말았다.

이윤하가 세상을 뜬 뒤, 아들 이경도 가롤로마저 붙잡혀 가자, 전주 이씨 문중에서는 이윤하의 입양을 원천무효화해서 파양(破養)해 달라는 청원을 예조에 올렸다. 종손이 연달아 천주교를 믿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형편임을 호소해서 결국 국가의 승낙을 받아냈다. 입양된 종손이 죽고, 그 아들이 이미 종통을 승계한 상황에서, 애초의 입양 자체를 없던 일로 해달라는 전례 없는 주문이었지만, 끝내 허락을 받았다.

그 결과 전주 이씨 족보상에서 이윤하는 입양된 이극성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생부인 추()의 이름 아래 한 줄 이름이 적히고, 그 아래는 아예 ‘무후(無後)’ 즉 후손이 없다로 처리되었다. 이 시기 천주교인들의 족보는 온전한 것이 별로 없다. 후손들이 신앙을 굳건히 지켰을 경우는 순교로 손이 끊어졌고, 문중에서는 어떻게든 족보에서 천주학으로 죽은 죄인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가문을 지켜내려는 안간힘이 훼손된 족보의 기록 너머로 얼비친다. 하지만 그 끊어진 가닥을 하나하나 이어보면 얽히고설킨 혼맥으로 신앙을 이어,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를 이어간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다산은 자신의 문집에서 이벽을 말할 때는 실명을 밝혔지만, 이승훈만은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형(李兄)’으로만 썼다. 다산 시문집에서 ‘이형’을 검색해서 나온 결과는 모두 이승훈으로 보면 틀림없다. 이벽은 초기 천주교회의 리더였지만, 그는 천주교가 사학으로 지목되어 사회문제화되기 전에 갑작스런 병으로 죽은 데 반해, 다산의 자형 이승훈은 사학죄인으로 사형을 당해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도 다산의 시문 속에서 비슷한 검열의 흔적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그는 왜 이토록 천주교 관련 사실을 자신의 문집에서 철저히 은폐하려 했을까? 이것이 만년의 급격한 회심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자꾸 많아진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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