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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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요한, 고결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로 세상을 울리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 광암 이벽,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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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벽 요한 세례자 초상화




강물 같은 언변과 고상한 품행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은 멋진 남자였다. 외모가 훤출했지만 정신의 광휘로 더욱 빛났다. 그는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다산 보다 여덟 살 위였다. 그런데도 다산은 이벽을 부를 때면 늘 앞에 ‘우인(友人)’ 또는 ‘망우(亡友)’란 말을 붙이곤 했다. 마음이 통하는 벗으로 여긴 것이다.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전재한 것이 분명한 『조선순교자비망기』의 기록에서 다블뤼 는 이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벽은 키가 8피트나 되고 한 손으로 100파운드를 들어 올릴 정도였다. 우람하고 잘생긴 외모는 몹시 위엄이 있어 보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재능 또한 외모에 뒤지지 않았다. 언변의 장중함은 흐르는 강물 같았고, 지능도 천부적으로 뛰어나, 그는 언제나 사물의 이치와 학설의 근본을 이루는 내용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어디서든 사물의 본질을 파고드는데 몰두했다. (중략) 그는 일찍부터 당시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들을 열심히 공부했고, 학문적으로 자기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지식인들과 교분을 맺으려고 애썼다.”

처음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의 일에 대해서는 또, “생각이 아주 고상하고 품행이 아름다우며, 열정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사방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공부하도록 자극시켜, 이 나라에 구세주가 오시도록 길을 닦는 역할을 한 것이 세례자 요한과 비슷하다 하여 본명을 붙여주었다.”고 썼다. 그의 호 광암(曠菴)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광야(曠野)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연상시킨다.

1784년 4월 15일, 이벽이 두릉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다산 형제에게 천지창조와 육신과 영혼의 문제, 생사의 이치를 설파하던 장면과, 이가환, 이기양을 직접 만나 담판하여 논리로 격파했던 일, 이어 1784년 9월에 양근 마을 감호로 권철신을 찾아가 천주교의 도리를 설복하던 장면은 그의 호 광암의 힘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대대로 무과 출신 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보만(李溥萬)이 무과를 강력하게 권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예산까지 이병휴를 찾아가 유학을 공부했다. 안정복과 이병휴가 특별하게 그를 아꼈을 만큼, 성호학파 소장 그룹 중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앞서 소개한 「정산이병휴제문」에서 이벽은 이렇게 썼다. “생각해보니 1774년에 소자가 남쪽으로 내려가 처음으로 나아가 문하에 절을 올리고 6,7개월을 머물며 모셨었지요. 선생께서는 소자의 나이가 어리다 무시하지 않으시고, 권면하여 가르치시기를 그치지 않으셨고, 깊은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다.


장인 권엄과 홍유한의 우정, 이덕무의 이벽 평

당시 예산 여사울에는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벽이 찾던 ‘학문적으로 자기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지식인’ 중 하나였다. 이벽의 장인은 뒤에 호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권엄(權?, 1729-1801)이었다. 그는 다산이 「두 아들에게 쓴 가계(示二子家誡)」에서 “판서(判書) 권엄(權?)은 신장이 9척이 넘고, 허리 둘레와 생김새가 모두 보통 사람을 넘었다(權判書? 身長九尺餘, 腰圍面貌, 皆踰凡人.)”고 썼던 바로 그 사람이다.
 

권엄은 홍유한과는 서울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천진암 성지에 보관된 홍유한가 간찰 중에 권엄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여러 통이 남아, 둘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1785년 홍유한이 세상을 떴을 때 보낸 조문 편지에서 권엄은 “공은 나의 친구이면서 스승을 겸한 분이었다.(先府君吾之友情兼師道者也.)”고 쓰기까지 했다. 권엄의 사위 이벽이 예산에서 6,7개월을 머물며 이병휴에게서 공부할 때 장인의 친한 벗 홍유한을 방문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 다산은 자신이 살던 호현방에서 이벽의 집이 있던 저동을 지나 수표교를 건너 성균관을 통학했다.

이벽의 서울 집은 수표교에 있었다. 수표교 어디쯤이었을까?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齋亂藁)』 권27, 1778년 11월 26일자에 그 답이 나온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전언을 옮긴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근래 서울에서 서학(西學)과 수리(數理)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서명응(徐命膺)과 아들 서호수(徐浩修), 그리고 또 이벽(李檗)이 있는데, 그는 무인 이격(李格)의 아우입니다. 과거를 그만두고 나오지 않았지만, 사람됨이 고결하고, 지금 저동(紵洞)에 삽니다.(李德懋言: 近日京中, 以西學數理專門者, 徐命膺及子浩修, 而又有李檗, 卽武人格之弟也. 廢擧不出, 爲人高潔, 方居紵洞.)”

자기보다 13세나 어린 25세 청년 이벽의 존재를 이덕무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점이 놀랍다. 이벽은 이미 서학과 수리 방면의 전문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의 집이 수표교 인근, 지금의 중구 저동에 있었음도 확인된다. 이덕무는 이벽의 어떤 점을 두고 고결하다고 했을까?

 

설화적 부풀리기

황윤석은 또 『이재난고』 권 38, 1786년 5월 5일 기사 중 나동선(羅東善)과의 문답에서 다시 이벽에 대해 언급했다. 황윤석이 요즘 서울 사람 중 총명하고 특별한 선비가 있느냐고 묻자 나동선의 대답이 이랬다.

“이벽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월천군(月川君) 이정암(李廷?)의 후손이요, 병사 이달의 아들로, 이격(李格)의 형입니다. 책을 볼 때 한 번에 열 줄씩 읽어, 책장을 넘기는 것이 나는 듯합니다. 한쪽 눈이 위를 보며 한쪽 눈으로는 아래를 볼 수가 있고, 한쪽 눈은 왼편을 보면서 다른 한 눈은 오른편을 본답니다. 팔뚝 뼈가 둘이 아닌 통뼈로, 능히 세 번 공중 돌기를 하고, 위로 두 길이나 도약할 수가 있습니다. 평생 서양의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해서, 한때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나이 서른에 일찍 죽었습니다. 근년에 임금께서 서양의 문학은 율학과 역학(曆學), 그리고 수학 세 가지 외에 『천주실의』의 학문을 하는 자는 형조에서 그 책을 다 모아다가 불지르게 하고 안팎으로 엄하게 금하였습니다. 이군은 이때 계방(桂坊)에 따로 천거되었는데, 상소하여 스스로 천주학의 주장을 늘어놓았답니다.(有李蘗者, 月川君廷後之後, 兵使?之子, 格之兄也. 看書十行俱下, ?閱如飛. 目能一上視一下視, 一左視一右視. 臂骨不雙而單, 能三次回斡, 能上跳二丈. 平生酷好西洋之天主實義, 爲一時其徒之冠, 年三十而夭. 近年上命西洋文學, 自律曆數學三種以外, 其爲天主實義之學者, 自刑曹聚其書焚之, 嚴禁中外. 李君時入桂坊別薦, 上疏自列天主之說云.)

나동선의 이벽 평은 앞서 이덕무와 달리 대중적 윤색이 많이 첨가되었다. 조용히 빛났던 천재의 갑작스런 죽음이 설화적 부풀리기를 가져온 듯하다. 할아버지를 아버지라 하고, 형을 동생이라 하는 등 가족 관계 설명에 오류가 있고, 그가 계방, 즉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벼슬에 천거되었다는 것도 확인된 기록이 없다. 한 번에 열 줄씩 읽는 재주는 그의 천재성을, 통뼈는 그의 용력이 뛰어났음을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천주실의』에 빠진 사실만큼은 빼놓지 않았다. 그의 모든 수식 앞에는 천주교의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선학과 앵무새, 다산과 박제가의 만사

1785년 가을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다산은 「벗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輓詞)」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선학(仙鶴)이 인간 세상 내려왔던가? 훤칠한 풍모가 드러났었네. 깃촉은 눈처럼 깨끗하여서, 닭과 오리 시기해 성을 냈었지. 울음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면, 소리 맑아 풍진 위로 넘놀았다네. 갈바람에 홀연 문득 날아가버려, 구슬피 사람 마음 애닯게 하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羽?皎如雪, 鷄鶩生嫌嗔. 鳴聲動九?, ?亮出風塵. 乘秋忽飛去, ??空勞人.)”

그는 인간 세상에 잠깐 내려온 선학(仙鶴)이었다. 고결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로 세상을 울렸다. 그러더니 가을바람에 홀연 왔던 곳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한없이 슬프게 한다. 이벽에 대한 다산의 깊은 사랑과 그의 죽음 앞에 선 슬픔이 맥맥히 느껴지는 시다.

앞서 이덕무에 이어 박제가(1750-1805)도 이벽의 만시를 썼다. 「사애시(四哀詩)」 중 「이덕조(李德操)」란 작품이다. 둘은 겹치는 접점이 없는데, 서학에 대한 관심이 서로를 끌어 당겼던 것 같다. 시가 길어 한 대목만 보이면 이렇다. “하늘 바람 앵무새에 불어오더니, 번드쳐 새장 나갈 계획 세웠지. 여관방서 남은 꿈 깨어나서는, 푸른 산에 그 지혜를 묻고 말았네.(天風吹鸚鵡, ?成出籠計. ?廬罷殘夢, 靑山葬靈慧.)”

그는 새장 속 앵무새처럼 이목을 끄는 존재였는데, 때마침 불어온 천풍(天風)에 새장을 뛰쳐나가, 남은 꿈을 깨기도 전에 구슬 같은 지혜를 청산에 묻고 말았다고 썼다. 천풍은 천주학의 바람을 암유한 것일 게다. 한 사람은 이벽을 선학에 견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새장을 뛰쳐나간 앵무새에 견준 것이 눈길을 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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