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 광암 이벽,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 이벽 요한 세례자 초상화 |
권엄은 홍유한과는 서울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천진암 성지에 보관된 홍유한가 간찰 중에 권엄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여러 통이 남아, 둘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1785년 홍유한이 세상을 떴을 때 보낸 조문 편지에서 권엄은 “공은 나의 친구이면서 스승을 겸한 분이었다.(先府君吾之友情兼師道者也.)”고 쓰기까지 했다. 권엄의 사위 이벽이 예산에서 6,7개월을 머물며 이병휴에게서 공부할 때 장인의 친한 벗 홍유한을 방문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 다산은 자신이 살던 호현방에서 이벽의 집이 있던 저동을 지나 수표교를 건너 성균관을 통학했다. |
설화적 부풀리기
황윤석은 또 『이재난고』 권 38, 1786년 5월 5일 기사 중 나동선(羅東善)과의 문답에서 다시 이벽에 대해 언급했다. 황윤석이 요즘 서울 사람 중 총명하고 특별한 선비가 있느냐고 묻자 나동선의 대답이 이랬다.
“이벽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월천군(月川君) 이정암(李廷?)의 후손이요, 병사 이달의 아들로, 이격(李格)의 형입니다. 책을 볼 때 한 번에 열 줄씩 읽어, 책장을 넘기는 것이 나는 듯합니다. 한쪽 눈이 위를 보며 한쪽 눈으로는 아래를 볼 수가 있고, 한쪽 눈은 왼편을 보면서 다른 한 눈은 오른편을 본답니다. 팔뚝 뼈가 둘이 아닌 통뼈로, 능히 세 번 공중 돌기를 하고, 위로 두 길이나 도약할 수가 있습니다. 평생 서양의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해서, 한때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나이 서른에 일찍 죽었습니다. 근년에 임금께서 서양의 문학은 율학과 역학(曆學), 그리고 수학 세 가지 외에 『천주실의』의 학문을 하는 자는 형조에서 그 책을 다 모아다가 불지르게 하고 안팎으로 엄하게 금하였습니다. 이군은 이때 계방(桂坊)에 따로 천거되었는데, 상소하여 스스로 천주학의 주장을 늘어놓았답니다.(有李蘗者, 月川君廷後之後, 兵使?之子, 格之兄也. 看書十行俱下, ?閱如飛. 目能一上視一下視, 一左視一右視. 臂骨不雙而單, 能三次回斡, 能上跳二丈. 平生酷好西洋之天主實義, 爲一時其徒之冠, 年三十而夭. 近年上命西洋文學, 自律曆數學三種以外, 其爲天主實義之學者, 自刑曹聚其書焚之, 嚴禁中外. 李君時入桂坊別薦, 上疏自列天主之說云.)”
나동선의 이벽 평은 앞서 이덕무와 달리 대중적 윤색이 많이 첨가되었다. 조용히 빛났던 천재의 갑작스런 죽음이 설화적 부풀리기를 가져온 듯하다. 할아버지를 아버지라 하고, 형을 동생이라 하는 등 가족 관계 설명에 오류가 있고, 그가 계방, 즉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벼슬에 천거되었다는 것도 확인된 기록이 없다. 한 번에 열 줄씩 읽는 재주는 그의 천재성을, 통뼈는 그의 용력이 뛰어났음을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천주실의』에 빠진 사실만큼은 빼놓지 않았다. 그의 모든 수식 앞에는 천주교의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선학과 앵무새, 다산과 박제가의 만사
1785년 가을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다산은 「벗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輓詞)」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선학(仙鶴)이 인간 세상 내려왔던가? 훤칠한 풍모가 드러났었네. 깃촉은 눈처럼 깨끗하여서, 닭과 오리 시기해 성을 냈었지. 울음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면, 소리 맑아 풍진 위로 넘놀았다네. 갈바람에 홀연 문득 날아가버려, 구슬피 사람 마음 애닯게 하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羽?皎如雪, 鷄鶩生嫌嗔. 鳴聲動九?, ?亮出風塵. 乘秋忽飛去, ??空勞人.)”
그는 인간 세상에 잠깐 내려온 선학(仙鶴)이었다. 고결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로 세상을 울렸다. 그러더니 가을바람에 홀연 왔던 곳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한없이 슬프게 한다. 이벽에 대한 다산의 깊은 사랑과 그의 죽음 앞에 선 슬픔이 맥맥히 느껴지는 시다.
앞서 이덕무에 이어 박제가(1750-1805)도 이벽의 만시를 썼다. 「사애시(四哀詩)」 중 「이덕조(李德操)」란 작품이다. 둘은 겹치는 접점이 없는데, 서학에 대한 관심이 서로를 끌어 당겼던 것 같다. 시가 길어 한 대목만 보이면 이렇다. “하늘 바람 앵무새에 불어오더니, 번드쳐 새장 나갈 계획 세웠지. 여관방서 남은 꿈 깨어나서는, 푸른 산에 그 지혜를 묻고 말았네.(天風吹鸚鵡, ?成出籠計. ?廬罷殘夢, 靑山葬靈慧.)”
그는 새장 속 앵무새처럼 이목을 끄는 존재였는데, 때마침 불어온 천풍(天風)에 새장을 뛰쳐나가, 남은 꿈을 깨기도 전에 구슬 같은 지혜를 청산에 묻고 말았다고 썼다. 천풍은 천주학의 바람을 암유한 것일 게다. 한 사람은 이벽을 선학에 견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새장을 뛰쳐나간 앵무새에 견준 것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