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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전쟁의 기도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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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내 나라 내 겨레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은 지 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갈라진 형제자매와 같은 겨레를 사랑하지 못하고 적대시 한 적은 없었는지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보내는 지금, 위기에 처한 남북관계를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강주석 신부의 특별기고를 통해 들어 본다.



■ 평범한 사람들의 전쟁

몇 해 전 출간된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는 한국전쟁을 겪었던 ‘보통 사람들’의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엮은이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한국전 미군 노획 문서를 연구하다가 이 편지들을 발견했다.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한 편지들은 바다 건너 먼 나라로 넘어갔고,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 혼돈의 시절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이면을 보여주는데, 다음은 ‘원산시 제14인민학교’ 학생이 쓴 1950년 7월 5일자 위문편지다.


“인민군 아저씨 앞

일선에서 싸우시는 인민군대 아저씨들은 우리 조과(조국과?) 강토을 워하여서 인민군대 아저씨들은 밤낯을 가리지 않고 새우시는대 우리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인민군대 아저씨와 같이 한일터에 나가서 인민군대와 같이 싸우게다고 생각합니다 인민군대 아저씨들은 끝까지 싸워달려는 것을 부탁합니다 ?이상-”


맞춤법에 틀리게 편지를 쓰는 어린이도 싸울 것을 다짐했던 전쟁에서 병사들은 서로에게 총을 쏘았다. 전쟁을 결정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희생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심각했는데, 북측의 인명피해가 남한의 1.5배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전쟁 초기부터 이뤄진 폭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당시 미 공군 지휘부는 폭격으로 인해 북한 인구의 20가 사망한 것으로 평가한다. 실제로 한국전쟁에 쏟아 부어진 폭탄 63만 톤은 미국이 태평양전쟁 전역에서 사용한 폭탄 50만 톤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미 공군의 폭격 결과 통계에 따르면, 흥남 시가지 85, 신의주는 60, 사리원은 95가 파괴됐다. 위문편지를 쓴 소년이 살았던 원산도 80가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다.


■ 전쟁에 참여한 교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앗아간 전쟁은 정의롭게 수행되지 않았지만, 교회의 지도부가 바라본 한국전쟁은 분명 성전(聖戰)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 중에도 발간됐던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 전신)는 전쟁에 대한 교회의 시각을 드러내는데, 1951년 1월 14일자는 전쟁의 성격을 “위선적 평화의 약속으로 약소민족을 마비시키는 크렘린의 죄악”도 크지만, “양을 가장한 일희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폭력과 증오 속에서 교회는 신자들의 참전을 독려했으며, 더 나아가 성직자가 직접 ‘가톨릭 부대’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1950년 8월 부산 범일동성당에서는 피난 생활을 하던 서울교구와 북한 지역 출신 신부 10여 명이 ‘가톨릭 청년 결사대’를 조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젊은 신부들과 신학생, 청년 신자 등이 주도하는 부대는 국방부의 승인까지 얻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기 공급의 어려움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천주교회보가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시국을 준전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주교회보 1949년 11월 10일자는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지 이미 오래 전이다”라고 역설하면서 신자들에게 비행기 헌납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처럼 천주교회보와 「경향잡지」 등 당시의 교회 언론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했다. 억울한 분단이 가져온 적대적 대립에서 교회는 우리 민족을 중재하지 못했고, 오히려 ‘적’에 대한 무력투쟁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교회언론의 이러한 논조는 일제 말기 전시 동원 체제에서, 교회 지도부가 취했던 입장과 많이 닮아 있었다.


■ 전쟁의 승리를 위한 기도

일제강점기의 교회는 애국이 신앙인의 의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에게 전시 동원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한 경험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경향잡지」는 매호마다 전쟁에 대한 지침을 실었는데,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과 같은 조직들은 청년신자들의 참전을 독려하면서 국방헌금과 병기 헌납운동을 장려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던 박해시대가 지나고, 이제 안전을 위한 ‘평화’를 갈망했던 교회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경향잡지」 1942년 3월호에는 ‘대동아전쟁 기구’라는 기도문이 등장하는데, 교회는 ‘전쟁의 승리 위한 기도문’을 “매일 각 성당에서는 미사 후에, 그리고 각 가정에서는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후에 바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해 천주교회는 타종파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바쳤다는 주장도 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를 조사한 연구자의 기록을 보면,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 모금 실적은 적지만, 전승 축하 의례(미사)는 49배, 시국기도회는 6배, 강연회는 8배나 많이 열린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수치는 억압적인 식민 통치에서 불가피했던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 천주교회 지도부가 일제에 매우 협조적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 평화와 화해의 조건

2000년 대희년 선포 칙서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는 교회의 역사가 ‘성덕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를 부정적으로 증언하는 사건들도 기록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잘못들에 대해서 비록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앞서 간 사람들의 과오와 잘못의 짐’을 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어서 교황청이 2000년 3월에 발표한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은 교회의 죄를 인정하는 것과 화해로 나아가는 길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문헌은 희년 은총의 표지 중 하나인 ‘기억의 정화’가 “과거의 잘못들을 역사적, 신학적으로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온갖 형태의 증오와 폭력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1953년 7월 27일, 3년의 전투를 멈추는 정전협정이 맺어졌지만, 형제들이 서로를 살해했던 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전쟁을 끝내지 못한 우리 민족은 화해의 여정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다. 최근 더 경색돼 보이는 남북관계도 한반도의 적대적 대립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이 적대의 죄 가운데 화해를 중재하는 것이라면, 분열의 땅 한반도에서 중재의 소명을 가진 교회는 먼저 자신부터 화해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지난 세기 평화에 소홀했던 역사를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적을 죽이는 전쟁을 위해 기도했던 과거에 대한 참회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 교회가 진심으로 평화를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과오를 성찰하면서, 인류와 화해하신 그리스도 평화의 여정을 용감하게 시작하자.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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