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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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최초 로마 유학생 - 대구대교구(당시 대구대목구) 전아오·송경정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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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이탈리아 로마에 한국 최초로 유학 가 사제가 되기를 꿈꿨던 두 신학생이 있다. 대구대교구(당시 대구대목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다니던 이들은 제주 출신 전아오(아우구스티노) 신학생과 대구 비산본당 출신 송경정(안토니오) 신학생이다.

최근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교황청 협조를 얻어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 자료실에서 전아오 신학생이 자필로 새겨 넣은 한글 기도문을 찾아냈다. 100년 전 기도문을 중심으로 젊은 나이에 하느님 곁으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베이비 전! 사랑스러운 천사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저항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1월 키 160㎝ 남짓한 신학생 전아오(건강 진단서 기준 19세)와 송경정(기록상 당시 18세)은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함께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그들을 태운 배는 일본을 거쳐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을 경유해 약 2달 만에 목적지에 닿았다. 프랑스까지는 배로 이동했고 프랑스에서 로마까지는 기차를 이용했다.

이들은 대구대목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첫 입학생으로 드망즈 주교의 관심 속에 우르바노 신학교(현재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로 유학을 떠나 1920년 1월 로마에 도착했다. 한국교회 첫 로마 유학생이자, 당시 베네딕토 15세 교황을 공식적으로 직접 알현한 최초의 한국인 신학생이었다.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에서 발행하는 잡지 「알마 마테르」(Alma Mater)에서 전아오와 송경정에 대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신학생 둘 다 확실히 초창기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외모상으로 그들의 건장한 체격은 장차 성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서 많은 결실들을 맺을 수 있는 보증과도 같아 보였다.”

이 부분은 당시 동료 신학생들이나 교수 신부 평판을 취재해 엮은 기사로, 특히 기사에는 전아오 신학생에 대한 애정이 많이 담겨 있다. 동료들은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쾌활하고 사랑스러우며 생기가 넘치는 그를 ‘베이비 전’이라고 부르곤 했다.

더불어 그는 ‘사도직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또 ‘한계를 모르는’ 애덕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덕(聖德)을 위해 늘 자신을 단련시키며 동료들의 모범이 됐다.




■ 100년 만에 만난 기도

“차후에 이 글을 보는 자는 이 죄인을 생각해 성모경(성모송)을 한 번 암송해 주십시오.”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이 공개한 전아오가 우르바노 신학교 입학 직후 자필로 쓴 한글 기도문 맨 마지막 부분이다. 그는 무사히 공부를 마치게 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이 같은 내용을 적었다.

당시 우르바노 신학교 모든 입학생은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학업에 임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썼는데, 이 기도문은 그가 서약서 작성 약 2달 뒤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다. 통상적인 자필 서약서 외에 모국어로 별도 기도문을 쓴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 기도문을 찾아낸 이백만 주교황청 대사는 “편지 내용을 본 현지에서도 다들 놀랐다”며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고 울컥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자료실에 묻혀 있던 기도문이 햇빛을 볼 수 있게 돼 보람이 크다”며 “한국 신자들도 이 편지를 보면 성모송을 한 번씩 봉헌해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사도 이 편지를 본 날 저녁, 묵주기도와 성모송을 드렸다고 했다.

실제로 전아오의 성모신심은 남달랐다. 동료들이 “한 어린아이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단순하고도 신뢰에 찬 사랑을 지니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최근 이 편지와 함께 신학생들 이야기가 인터넷으로 먼저 국내에 공개되면서, 이를 본 신자들이 댓글로 성모송을 달며 이들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았다. 100년 전 전아오 신학생이 쏘아올린 기도가 신자들 마음에 닿은 것이다.






■ 죽음으로 승화된 사제의 꿈

안타깝게도 두 신학생의 꿈은 1922년 좌절되고 만다. 송경정은 결핵에 걸려 1922년 4월 귀국했다. 송경정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같은 해 5월, 전아오는 협심증으로 로마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부르던 성모 성월 5월에 그는 그렇게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송경정은 다음해인 1923년 5월 7일 대구 집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죽기 얼마 전 그를 만난 드망즈 주교 일기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1923년 4월 9일 월요일 아침에 날미(날뫼)성당을 강복하러 갔다. 거기서 나는 죽어 가는 송 안당(안토니오)을 보았는데, 그는 말도 못 하고 단지 눈과 머리로 감사의 표시를 할 뿐이었다. 성당에는 송 안당과 전 아오스딩(아우구스티노)이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은 1920년에 찍은 것이었다.”

이들은 사제의 꿈을 못다 이루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이들이 품었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찬란한 포부는 아직도 우리 교회를 비추고 있다. 현재 로마에 유학 간 대구대교구 신부들은 해마다 위령 성월이면, 로마 시내 베라노 묘지에 있는 전아오 묘소 앞에서 그를 추모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전아오 신학생의 묘소에서 기도하고 온 이백만 주교황청 대사는 “그동안 로마를 거쳐 간 우리나라 신학생, 사제, 수도자들이 참 많다”며 “이분이 바로 ‘한국 가톨릭 성소자들의 수호자’가 아닌가 한다”고 밝혔다.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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