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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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평협 가정선교체험 공모전 수상작] 믿음상(최우수상) - 현상길 ‘인내와 기도, 사랑으로 맺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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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실시한 가정선교체험 공모전 믿음상(최우수상) 수상작 두 편 가운데 현상길(마르첼리노ㆍ서울 홍은동본당)씨의 ‘인내와 기도, 사랑으로 맺은 열매’ 전문을 싣는다. 또 다른 믿음상(최우수상) 수상작인 조영훈(안토니오ㆍ대구 성미카엘본당)씨의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는 다음 호인 11월 29일자에 게재할 예정이다.



지금 일출봉 앞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을 그 방은 비어 있다. 벽에 걸린 결혼 50주년 기념사진 액자만이 당신들이 함께 지내던 고요한 방 안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꽃무늬 블라우스에 검정 조끼 차림으로 서 계신 어머니 엘리사벳 곁에 양복 차림으로 앉아 계신 아버지 미카엘. 고향에 갈 적마다 그 사진 앞에서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한 기도’를 바친 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두 분이 서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미카엘, 세례 받길 참 잘했어요.” “엘리사벳, 기도하는 당신 곁엔 늘 내가 있었지.”


2019년 2월 23일, 아버지는 한 달 남짓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셨다. 87세가 되시는 새해에 접어들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건강을 자신하시며 위 절제 수술에 동의하셨다. 그리고 제주 병원에서 힘든 수술을 받으신 후 아버지의 뱃속엔 겨우 몇 술의 음식만 담을 수 있는 작은 위 조각만 남게 되었다. 나의 귀에만 들리는, “온몸에 전이되었으므로 순식간에 나빠질 수 있다”는 퇴원 날 주치의의 속삭임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고통스러운 병원 생활을 끝내고 아버지를 집에 편안히 모셔 맛있는 죽이라도 맘껏 드시게 하면 건강이 좋아지실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기도로써 붙들었다. 입원과 수술, 병상 생활 내내 아버지의 무사 퇴원을 위해 자식들이 바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음에 감사드리며,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한겨울에 떠났던 바닷가 마을 오조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파킨슨병으로 20년 가까이 오로지 남편의 수발에만 의지해 삶을 이어오시던 어머니는, 아내 마르셀리나와 여동생 율리안나의 설득 끝에 아버지의 퇴원 직전 제주시 외곽의 한 요양원에 입원하신 상태였다. 중증의 부모님을 한꺼번에 집에서 돌보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신 방에 들어간 아버지는 잠시 침대를 손으로 쓰다듬더니 바닥에 누우려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이젠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1년 전 7월 말경부터 척추관협착증 악화로 인해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당신 손으로 어머니의 모든 수발을 맡아 하시던 아버지는 반려의 체취가 묻어 있는 낡은 침대에 슬픈 표정으로 말없이 누우셨다. 낮은 탁자 위에 놓인 성모님상의 눈빛이 마치 어머니 엘리사벳의 그것인 양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하루 세끼를 위한 분투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반 공기 정도의 여러 가지 죽과 국을 조금씩 드셨는데, 때론 오일장에서 사다 구워 낸 싱싱한 갈치 한 토막을 손으로 잡고 맛있게 드시곤 하여 우리를 기쁘게 했다. 병원 침상에서 수술 후의 극심한 통증에 괴로워하시던 얼굴을 생각하니, 갈치 토막이라도 맛있게 드시며 흡족해하시는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아 끼니 때마다 등과 가슴을 두드려 드려야만 했다. 먹는 시간 외에 아버지는 거의 침대에 누워 계셨다. 화장실 갈 때는 휠체어를 이용했는데, 가장 기쁜 소식은 아버지가 대변을 보았다고 말씀하실 때였다. 그때마다 나는 어린애 대하듯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해 드렸다. ‘참 잘하셨어요!’ 그러면 일그러져 있던 아버지의 얼굴은 부드러워지고 입가엔 엷은 미소가 번지곤 했다.

그렇게 겨울의 끝자락이 흘러 3월이 되었다. 성당 일과 생업 때문에 아내와 여동생은 각각 서울과 남해로 올라갔다. 듬직한 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바닷가의 까만 돌담길을 따라 갓 피어난 노란 유채꽃들은 샛바람에 한들거렸다. 고향에 갈 때면 다니는 성산포성당에서 3월 첫 주일미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매괴동산 뜰에서 수녀님을 만났다. 자주 어머니를 찾아와 대화도 나누고 기도해 주시던 그 수녀님은 어르신 소식을 들었고 또 고생하신다면서, 아버지의 세례를 위해 기도하시겠다며 밝은 목소리와 웃음으로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 순간, 내 마음속으로 ‘세례’ 두 글자가 다시금 화살촉처럼 날아와 박혔다.

세례 -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 따뜻해지는 말, 세상에서 가장 은혜로운 말, 나에겐 영혼 치유의 묘약과도 같이 느껴지는 말이다. 나는 60세가 되던 2015년 1월 서울대교구 홍은동성당에서 ‘외짝 교우 교리반’ 과정을 이수한 후, 사순절인 2월 말에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 마르첼리노로 새로이 태어났다. 세례식이 진행되던 시간, 나의 머릿속에는 두 달여 전 성탄절 전야의 장면이 그려졌다. 밤미사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에게 “나, ‘외짝 교우반’에 들어가려고…” 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가 말끝을 흐렸을 때, 갑자기 감격에 겨워 소리치는 아내 마르셀리나의 커다랗게 반짝이던 눈빛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뭐라고? 정말? 세례를 받겠다고요? 오, 하느님! 이건 기적이야!”

‘세례가 기적이라니…?’ 그때 나는 마르셀리나가 조금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세례는 진실로 기적임을. 그것은,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남자와 결혼 후 33년의 긴 세월을 감내해 온 아내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의 선물임을. 또한 그것은, 거실에 성모님상을 모시려던 당신의 신심을 향해 모진 혀로 상처를 입혔던 사랑하는 큰아들을 위해 수없이 바치셨을 어머니 엘리사벳의 기도에 응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임을. 세례는 가족의 기다림과 기도, 인내와 사랑의 열매임을.

수녀님의 말씀과 위로에 용기를 얻은 나는 집에 돌아와 아내와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여 기도를 부탁했다. 어떤 힘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일어났고, 그 힘은 아버지를 향한 이야기의 물꼬를 트게 만들어 주었다. 끼니마다 소량의 죽을 드신 후 속이 조금 편안해지시면, 나는 아버지 곁에 앉아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어머니 엘리사벳의 신앙생활에 대한 당신의 기억을 되살려 드리는 일에 집중했다.

아침저녁이면 성가를 부르시며 평화방송과 함께 바치시던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가 자나깨나 바라보시던 십자고상과 성모님상, 봉성체를 위해 다달이 씩씩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찾아오시던 성산포성당 주임신부님, 어머니의 쾌유를 빌며 올려주던 레지오 단원들의 낭랑한 기도 소리, 가끔 깜짝 방문하시어 이야기도 나누고 무릎 꿇어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해 주시던 수녀님의 명랑한 목소리와 웃음 등….

그런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시며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죽을 드신 후 휠체어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쑥스러운 듯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 한 달에 한 번씩 성당에 갔다, 자전거 타고. 네 어머니 교무금도 내고. 수녀님도 만나고….”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눈을 감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애틋하게 보였다. 그제서야 수녀님께서 언젠가 집에 왔을 때 들려준 말씀이 생각났다. ‘제가 어르신께 세례받으시라 했더니 싫다고는 안 하시고 웃기만 하시더군요. 거부 아닌 침묵은 수용이에요.’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마음의 변화를 직감했고, 내 안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세례받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다음 세상에서 어머니와도 만날 수 있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휠체어를 밀며 방으로 들어갔고, 침대에 누우신 아버지는 잠시 큰 한숨을 내쉬시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응답의 신호였다.

“아, 아버지! 그렇게 하시겠다고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 성탄 전야처럼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때의 아내처럼 똑같이 소리치며 두 손을 모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곧바로 나는 아내와 동생들에게 ‘굿 뉴스’를 전하였다. 다들 놀라워하였으며, 기뻐하였다. 나는 내가 세례를 받던 때의 설렘보다도 더 벅찬 감동을 느꼈으며, 마루의 벽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하염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콧잔등은 시큰해지고, 두 눈은 젖어 들고 있었다.

그날 밤, 성산포성당 연령회장직을 맡아 활동하시는 사촌 형님 프란치스코께 전화로 소식을 전해 드렸을 때, 그분 또한 무척이나 놀랍고 반가워하셨다. 프란치스코 형님은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찾아와 돌아가시기 전에 대세라도 받았으면 하는 의사를 밝히시긴 했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성향상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형님은 본당 신부님과 상의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는데, 확답은 빛처럼 빠르게 날아왔다. 목요일 날 집에서 대세를 받는 것으로.

퇴원 12일째 되는 3월 7일 오전, 부드러운 봄바람이 흐르고 따스한 봄볕이 가득히 내려앉은 바닷가의 작은 집에서 마침내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형님의 주관 아래 대세를 받으셨다. 대부는 한동네 친지 어르신인 박 아킬레오께서 기꺼이 맡아 주셨다. 아버지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형님께서 ‘미카엘’로 정하셨다. 아버지 생신일인 9월 28일과 가장 가까운 날인 9월 29일이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이어서 세례명을 정해 드린다는 프란치스코 형님의 설명을 듣는 아버지의 입가엔 엷은 웃음이 번졌다. 세례명이 마음에 드시냐는 형님의 물음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연신 환한 미소를 머금으셨다. 이 얼마나 오래만에 보는 아버지의 웃음인가. 병고와 수술 후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시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복음에 이르신 그대로 ‘거룩한 변모’의 현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 미카엘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성령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며 세례 후에도 자주 마음속으로 묻기를 되풀이하던 나는, 아버지의 세례가 바로 성령의 이끄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빛을 입고자 하고, 그 불을 안고자 하며, 그 위로를 받아 누리고자 원하는 모든 시공간에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온몸과 정신으로 알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아버지의 세례 소식을 전해 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잡으며 어린애처럼 기뻐하셨다. 오랜 병고로 일그러지다시피한 얼굴은 밝게 빛났으며, 목소리엔 예전에 없던 힘이 실렸다.

“잘했구나. 미카엘 천사…. 이제야 내가 안심하고 갈 수 있겠어.”

어머니 엘리사벳의 떨리는 목소리는 기쁨 반 슬픔 반으로 내 귓가를 바람처럼 애잔하게 스쳐갔다.

세례 후 아버지 미카엘의 투병 생활에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닦고 식사를 하시기 전,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신 채 당신의 짝이 앉아 매일 기도를 하시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 주모경을 바치셨다. 성호경을 하신 후, 아버지는 마치 글자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B4용지에 커다란 글씨로 인쇄되어 코팅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천천히 읽으셨다. 아버지와 같이 주모경을 바칠 때마다 나는 가슴의 심연에서 울컥 하고 치밀어오르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할 길 없었다.

더 건강하시던 날에 어머니 엘리사벳의 손을 잡고 아름다운 성산포성당에 함께 가시어 미사를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바로 작년이라도 이 방의 성모님상 앞에서 두 분이 함께 성모송을 바칠 수 있게 해 드렸더라면 얼마나 행복해 하셨을까. 회한은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을 무너뜨리곤 했다.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낯선 요양원에서 홀로 덜그럭거리는 틀니를 붙들고 간신히 한술밥을 힘겹게 넘기고 계실 어머니 엘리사벳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후회의 뜨거운 눈물을 삼키곤 했다. 왜 자식으로서 좀더 일찍 아버지를 모시고 이끌어 드리지 못했던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시간이 흐를수록 마른 가지처럼 쇠잔해지시는 아버지의 육신을 대할 때마다 네 번째 계명은 나에게 호된 채찍을 가해 왔다.

퇴원한 지 약 4개월, 아버지 미카엘의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통증이 심해지던 6월 16일에 어머니께서는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하느님 나라로 떠나셨다. 그리고 그 뒤 두 달 열흘 만인 8월 26일, 결국 아버지 미카엘께서도 어머니 엘리사벳의 뒤를 따라 가셨다. 눈을 감으신 후 아버지의 모든 일은 어머니 때와 똑같이 이루어졌다. 신자들의 연도, 비 내리는 아침 성산포성당에서의 장례미사, 가족 공동묘지에의 안장, 바로 곁에 같은 크기의 봉분 조성까지 마치 어머니가 하늘에서 시키고 계신 듯하였다.

아버지 미카엘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치고 묘소를 떠나오기 전, 나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봉분을 쓰다듬으며 아버지께 속으로 여쭈었다. ‘아버지, 어머니 곁에 계시니 좋으시지요?’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신 채, 대세를 받으시던 그 봄날처럼 미소만 지으실 뿐이었다.

어느새 늦여름 비는 그치고, 제주의 짙은 초록 들판 위의 하늘은 샛바람을 불러 먹구름을 걷어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15인승 장의 버스 안에서 나는 문득 비신자인 남동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 가족 중에 너만 남았구나.”

재작년에 심장 질환으로 한번 아찔했던 순간을 경험했던 남동생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수녀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거부 아닌 침묵은 수용이에요.’ 나는 지금 말해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은 침묵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웃기까지 했으니…. 푸른 빛이 점점 더 널따랗게 퍼져 가는 하늘을 향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화살기도를 쏘아올렸다.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저희 가족을 축복해 주소서.’




현상길 (마르첼리노·서울 홍은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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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11-1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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