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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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2) 신학적 사유와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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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

한 시절 철학과 신학은 학문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학문의 주도권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으로 전이되고 있다. 인문학의 영역에서마저도 철학과 신학은 심리학에 밀리는 듯한 인상이다. 신학은 중심에서 멀어진 변방의 학문이 되었다. 어쩌면 오히려 변방에서 신학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 변방의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했듯이 말이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진다. 신학은 신앙을 탐구하고, 교회를 성찰하며, 세상을 읽어내야 한다. 신학은 신앙과 영성의 성장과 성숙에, 교회와 사목의 현장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학문의 쓸모는 실제적 효용성과 실천적 효과성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실용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인식적 앎의 축적으로서의 학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좁은 의미에서의 학문은 체계적인 방법과 전문적인 언어와 개념을 매개로 전업적 학자들에 의해 전개된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학문, 즉 사유와 성찰로서의 학문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의 학문은 점점 사람과 삶과의 관계성을 놓치고 자기들만의 리그에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넓은 의미의 학문, 즉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사유와 성찰로서의 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본성상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맹목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언제나 이해하는 신앙, 해석하는 신앙, 식별하는 신앙이다. 신앙은 사유와 탐구와 성찰의 행위를 포함한다. 모든 신앙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사유하고, 탐구하고, 성찰해야 한다. 신앙인은 모두가 신학자다.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오해했다. 생각은 믿음을 방해한다고, 진정한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라고 강조해왔다. 물론 믿음은 사유와 탐구와 성찰을 넘어선다. 하지만 사유하지 않는, 질문하지 않는, 성찰하지 않는 믿음은 왜곡되고 변질될 위험이 많다. 삶과 신앙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 행동, 태도가 정말 복음적(신앙적)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 실제적 내용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하는 신앙의 말들과, 그저 종교적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과 태도들이 신앙의 징표일 수 없다. 생각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사람만이 참다운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은 모든 신앙인에게 요청된다.


■ 신학적 행위

신학하는 일은 신앙과 복음의 시선으로 우리의 말과 신념, 감정과 행동, 관점과 태도를 사유하고 성찰하는 과정이다. 신학적 행위는 우리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학적 행위 안에는 경험(experience)과 탐구(exploring)와 성찰(reflecting)과 반응(responding)이 포함된다. 신학적 사유는 경험에서 출발한다. 무언가를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을 통해 받은 느낌과 감정과 인상들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탐구한다는 것은 그 경험이 발생시킨 생각이나 감정이나 이미지들을 곰곰이 살피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런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들었는지, 그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탐구 안에는 정치·경제적, 역사·사회적, 문화·종교적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포함된다. 성찰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석과 해석을 다시 숙고하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왜곡되는 건 아닌지,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사용한 자신의 관점들이 복음적이고 신앙적인지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학문적 관점에서 말하면, 성찰하는 행위는 현재 상황을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과 연결하는, 상관관계적(correlational) 과정이다. 반응한다는 것은 탐구하고 성찰한 내용을 구체적 삶의 자리에 적용하는 일이다. 신학은 사유이며 동시에 실천이다. 진정한 신학은 언제나 실천적이며 변혁적이다.

신학적 행위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즉, 자신의 경험, 말, 감정, 정서, 행동, 태도를 살핀다. 둘째,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입장과 관점에서 구성되고 있는지 헤아린다. 즉, 자신이 가진 신념, 주장, 확신, 의견 등이 어디에서 기인되고 있는지 숙고한다. 셋째, 자기 삶의 환경과 문화를 탐구한다. 넷째, 성경과 교리, 교회의 전통과 역사, 앞선 신앙인들의 신학적 사유와 성찰을 공부한다. 신학적 행위에 있어서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해 보이지만, 앞의 셋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죽은 신학이 된다.


■ 신학적 태도 ? 정직함, 섬세함, 겸손함, 자기성찰, 경청과 대화

공부는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신학 역시 정직한 신앙적 질문을 던지는 일에서 시작된다. 신앙적 전통에 대한 질문이든 오늘의 상황에 대한 질문이든, 정직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참다운 신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직한 질문은 듣고 배우는 공부의 길로 나서게 하고, 사유하고 탐구하고 성찰하고 응대하는 신학적 실천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신학은 성급하지 않고 섬세하게 살피고 헤아리는 자세와 태도를 요청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성모님의 태도는 신학하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핵심 태도다. 서둘지 않고 한 호흡을 쉬는 마음과 태도는 기도의 멈춤과 닮아있다. 기도하기 위해 잠시 멈춰서야 하는 것처럼, 신학하기 위해서 때때로 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분주한 경쟁의 세상에서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신학은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진리이지만, 신앙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전통은 당대적 확실성일 뿐이다. 모든 것은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 있다. 이념적 확신이든 학문적 확신이든, 모든 확신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신학은 겸손하고 개방적인 태도에 그 방점이 있다.

신학은 먼저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다. 성찰은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지 타자를 성찰하는 일이 아니다. 타자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일이었다. 신학은 언제나 자기반성적이어야 한다.

신학은 가르치는 일이라기보다는 경청하고 배우는 일이다. 신학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상호적이기도 하다. 신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학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경청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린 대화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 문화와 신학 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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