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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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프란치스코의 집 에서 재기의 꿈 키우는 서찬일씨 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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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 노숙자 서찬일(39)씨.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 근무한 그는 중국 무역 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후 지난해 11월 입국했다.
빈털터리 서씨의 서울역 노숙생활이 이어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직장을 구하 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노숙 생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요즘 서 울 제기동에 위치한 실직 노숙자 쉼터 프란치스코의 집 에서 생활하며 재기의
꿈을 키워오고 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노숙 생활에서 오는 절망감 이 세상에 홀로 떨어진 듯한
고독감 그리고 자살 충동. 서씨는 이 모든 것들을 차분하게 털어놨다. 편집자


실직자 생활도 벌써 3개월째.
3일을 굶은 적도 있다. 그때는 눈이 가물가물 해지며 사람이 이래서 죽는구 나 싶었다. 노숙의 충격을 삭이기 위해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온 시내를 돌아 다니기도 했다. 아무 데서나 내려 마냥 걷기도 했다.
강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고 허리띠만 보면 목을 매달고 싶을 정도였다. 자살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실직 노숙자 다.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서 근무했고 중국에서 무역업까지 했던 나는 처음에 는 실직 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와 닿지 않았다. 노숙 은 더할 나위 없었다. 과 거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그 노숙 생활을 내가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그 동안 성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8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 대기업 건설회사에 입사한 나는 이후 직장에서
인정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중국 출장을 자주 다니던
나는 무역업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니던 직장도 과감히 그만두 었다. 그래서 88년부터 무역업에 뛰어들어 중국에 신우무역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로부터 10년 나는 단돈 50만원만을 가진 채 지난해 11월 귀국했다.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10년 동안 나의 젊음을 바친 결과는 고작 50만원이 었던 셈이다. 유일한 혈육인 형과 어머니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캐나다로 이 민을 가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인숙에 기거하며 이곳 저곳으로 직장을 구하고 다녔다. 그러 나 IMF체제 아래서 직장을 구하는 일이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막연하게나마 가졌던 희 망들은 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위기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해졌다. 부모님이 이북 출신인 탓에 친척이 한 명도 없어 급한 대로
옛날 친구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갈 곳 없는 나는 서울역 노숙생활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가장 추운 한겨 울에...
지금 생활하고 있는 실직자 쉼터인 이곳 프란치스꼬의 집으로 오기 전까지
한달 동안 나는 거의 술과 함께 지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다. 자살충동을 느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미래가 없다는 사실 은 나를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했다.
노숙 생활에서 나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노인들을 밀쳐내고 좋은 자리를 차 지하려는 젊은 노숙자들 종교단체에서 나눠준 겨울용 방한복을 소주 몇 병과
바꾸는 사람들 신참 노숙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돈이 될만한 것을 훔치는 고참
노숙자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노숙자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 는 듯했다. 더구나 지하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특히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볼 때는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에게도 한때는 단란했던 가족이 있었다. 일에만 파묻혀 살던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한 조선족 처녀를 만나고 나서 였다. 지난 95년 북 경에 있는 한 한국 대기업 계열사에 근무하던 그녀를 보자 나는 한눈에 반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녀의 집에 많은 지참금을 주고 결혼을 했다. 그러나 단 란했던 신혼은 잠시 뿐이었다. 그녀가 다른 한국 남자와 눈이 맞아 한국으로 도 망을 간 때문이었다. 이후에 그녀가 서울 강남의 한 학원에서 중국어 강사를 하 며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처를 잃어버 린 못난이가 뭐 더 바랄 것이 있다고 옛정을 찾아 나서겠는가.
캐나다로 이민간 어머니와 형도 얼마 전에 연락을 해보았지만 상황은 생각보 다 심각한 듯 했다. 한국 생활이 어려워 이민을 떠난 터라 아직 자리도 못 잡고
상당히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나를 유달리 사랑하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셔서 보험일을 하며 어렵게 대학 학비를 대시던 어머니. 고생만 하시며 일평 생을 사신 어머니에게 변변한 효도 한번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비록
하수구 청소일을 하며 하루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지만 꾸준히 저금을 해
나중에 꼭 어머니를 한국에서 모실 생각이다.
과거의 화려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 지금의 생활이 견디기 힘들다. 늘 마음을
낮추고 주위 사람들의 작은 정성에도 감사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 2의
인생을 위해 과거의 기억과 자존심은 이미 땅속에 묻은 지 오래다.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중국말에도 능통하지 않는가. 언젠가는 반드시 다 시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더 멀리 뛰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급했던 마음도 조금은 편해진다.
나처럼 희망을 갖고 재기를 꿈꾸는 실직 노숙자들이 의외로 많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나부라져 잠을 잔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사회의 낙오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의 작은사랑과
부축만 있으면 곧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많다.
나와 많은 실직 노숙자들의 희망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린다. 열심히 일을 하 면 보답이 주어지는 사회 실직자와 가난한 서민들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소망한다.【정리=우광호 기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199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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