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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13·끝)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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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오상 받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벽화.



프란치스코는 성자의 육화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제한 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따라서 그가 추구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삶”은 곧 하느님 사랑의 충만함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 충만함은 결코 세속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속의 모든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고유한 것이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이를 향해, 가장 부유한 분이 가장 비천한 이를 향해, 거룩한 분이 죄인을 향해 내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충만함에 프란치스코는 끝없이 탄복하며 찬미했다.

그러나 그가 세속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세속을 떠났다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세속의 모든 관계와 단절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관계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차원과 질서로 승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모든 찬미는 만물 안에서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시고 존재토록 하시며 모든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것이었다.



모든 괴로움을 십자가로 받아들여

프란치스코가 세속을 가장 철저하게 이탈했음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오상(五傷)’을 들 수 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224년 9월 17일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받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상을 받은 시기가 그다지 행복하거나 편안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랜 고행과 순례 생활로 육신의 건강은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이미 자신의 지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형제회의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대단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육신과 정신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아들였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따르고 부분적으로 일치할 수 없으며, 그분의 영광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의 영혼과 육신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궁극적 일치를 이루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는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는 고통 속에서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되돌아봤으며,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고, 그 선함의 항구성에 압도됐다. 하느님께서는 영육의 고통을 겪는 그에게 오상의 고통을 더하여 내리셨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찬미였다.



피조물의 노래

‘태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피조물의 노래’는 그가 오상을 받은 직후 고통의 한복판에 있던 1224년에서 1225년 사이의 겨울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나고 의미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진정한 가치는 이 아름다운 노래가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 혹은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에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피조물의 노래’에서 그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선하심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이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생겨나온다는 인식은 프란치스코를 지금보다 더 큰 애정으로 가득 채웠고, 그래서 그는 아주 미미한 피조물까지도 형제, 자매로 부를 수 있었다. 결국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창조 본성에 맞게 회복시켜 주시는 것도 하느님의 선하심이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긴밀히 맺어질 수 있다. 이러한 긴밀함이 바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형제적 사랑의 원천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실한 영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결합할 때 우리는 정배들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마태 12,50)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의 회복은 신학적이고 관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실질적 체험이며 비할 데 없는 커다란 위로다. 이는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 구해지는 충만함이며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다.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사랑, 겸손하고 가난하며 단순하고 자신을 낮추어 순종하는 사랑을 원천으로 그는 남다른 덕행의 모범을 구체적으로 실현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영적 가족과 교회와 인류 전체에 전달했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하늘에서 모시는 것은, 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위로가 되고 아름답고 감탄스러운 그러한 정배를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한지! 또한, 흡족스럽고 겸손하고 평화롭고 감미롭고 사랑스러우며 무엇보다도 먼저 열망해야 할 그러한 형제와 그러한 아들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하고 소중한지!”



※다음 호부터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삶과 영성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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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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