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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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6) 순명의 정신

성화의 길로 나아가려면 순종, 또 순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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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길로 나아가려면 순종, 또 순종해야

▲ 성모의 마을 수사들이 ‘성모 기사회’지 발송 작업을 하고 있다.



콜베 신부가 수도원과 요양원을 오가며 병고와 싸우고 있던 그 시기에, 로마에서 설립한 성모 기사회는 1221년 1월에 교황청으로부터 교회 공식 신심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같은 달에 ‘성모 기사회’지 발간이 시작된다. 그는 잡지의 발간이 세상에 성모님의 정신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사도적 열정으로 자신의 병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미련없이 성모님께 의탁하였다. ‘어머니, 이제는 어머니께서 일하실 때입니다.’



병고 통해 완전한 성모의 도구로 변모

그가 겪은 병고는 오히려 그를 더욱 완전한 성모님의 도구로 변모시켰다. 성모님의 도움으로 하는 사업에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시작한 모든 사업은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에도 나날이 번창했으며, 잡지 발간 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그는 성모님의 사업에 전념하는 공동체의 설립이 절실함을 느꼈으며, 이를 위해 1927년 12월, ‘성모의 마을(Niepokalanow)’을 건설한다. 새로이 성모의 마을에 정착한 콜베 신부와 형제들은 프란치스칸 수도자로서 청빈과 정결, 순종을 충실히 실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아낌없이 봉헌했다. 물론 성모님의 사업을 위한 전적인 투신이 공동체의 목적이자 목표였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성모님과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다.

“외적인 성장이 진정한 발전이 될 수가 없다. ‘성모의 마을’의 진정한 발전은 무엇보다도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바로 우리 영혼의 성화에 있다. 우리의 영혼이 성모님의 뜻에 더욱 더 일치할 때마다 ‘성모의 마을’은 진일보한다. 따라서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기사회의 모든 회원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성모의 마을’에 있는 우리가 가을날 낙엽처럼 흩어진다 하더라도, 기사회의 이상이 여전히 우리 영혼 안에 더욱 깊이 남아 있다고 하면, 우리는 이것이 바로 ‘성모의 마을’의 가장 위대한 발전의 순간이라고 용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성모님과 일치할 수 있는가. 바로 ‘순종’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콜베 신부는 이야기한다. 특히 그는 수동적이고 외적인 순종과 구별하기 위해 ‘거룩한 순종(Santa Obedientia)’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실 프란치스칸 영성의 전통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덕행은 ‘가난’임에도 콜베 신부의 말과 글 속에는 ‘가난’보다 ‘순종’이 더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성모의 마을’에 순종의 정신이 흘러넘치기를 갈망했다.

“완벽한 성스러움, 활동의 열의, 사도적 선교의 효과는 큰 지혜나 재능, 탁월한 능력, 나아가서는 기도나 보속의 양이 아니라, 바로 거룩하고 완전한 순종 안에서 드러난다. 거룩한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 성모님 손안의 도구로 변화한다. 마치 성모님의 원의가 거룩한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직접으로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 원의가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그것은 무한하다.”

이처럼 콜베 신부는 ‘순종’을 통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느님과 성모님의 뜻은 오로지 ‘거룩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며 결코 실패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성모님처럼 순종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과 성모님과의 소통은 더욱 직접적이고 긴밀해진다.

성모님처럼 순종한다는 것은, 성모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주의 깊게 듣고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며 거기에 겸손하고 무조건적인 자세로 결합함을 의미한다. 완전한 의탁을 통해서 나의 내적 삶을 오로지 하느님의 인도에 맡기고자 하는 자발적 원의가 바로 순종이라는 열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확신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삶에 대해 ‘초자연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의 삶은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진행되고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그 저변에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끄는힘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시각 안에서, 우리는 늘 변화하는 인간의 판단과 지혜가 아니라 영원하신 성모님께 의탁하는 것이 더 확실하고 지혜로운 일임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은 그런 과정을 통해 성화 된다. 그렇기에 콜베 신부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지성과 원의의 안내 역할을 성모님께 맡기며, 이를 위해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형제들에게 요청한다. 이 포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포함한 완전하고 전적인 포기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가장 권위 있는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



초자연적 순종으로 더 커지는 자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수동적이고, 창의성 없고, 그저 명령만 기다리는 순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콜베 신부는 초자연적인 순종이 절대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만약 누군가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봉헌하고자 한다면 그의 자유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원죄 없으신 성모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며, 그 자유는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통해서 오히려 강화된다.

‘거룩한 순종’에 대한 콜베 신부의 신뢰는 공동체 삶에 그대로 적용되며, ‘성모의 마을’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수도회 장상과 교회의 명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으며, 그들의 명 안에서 성모님께서 자신을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몇몇 수도자들이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신앙에 따라 하기보다 이성에 따라 하며, 초자연적인 사려에 의하기보다 자연적인 사려에 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장상들을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학식 있는 사람으로만 보는 것을 목격한다. 오! 거룩한 순종에서 얻는 모든 공로를 빼앗아 버리는 이러한 파괴적인 역병이 형제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장상이 무언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순종하는 데에 결코 은총의 부족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하느님께서는 장상의 명 안에서 당신 뜻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이들의 순종 안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종으로 인해 신앙인들이 잘못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왜냐하면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청해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하게 할 수 있는 합당한 에너지를 함께 주시기 때문이다.”

자기의 의견과 의지가 존중받는 현대 사회에서 콜베 신부가 말하는 순종의 정신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는 이런 단순하고 겸손한 태도를 통해서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수많은 일을 이루었고 그 모든 일에 흔들리지 않는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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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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