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11·끝) 착한 목자

아사 감방에서 천국의 문 연 ‘죄수 번호 16670’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콜베 신부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아우슈비츠 아사 감방을 참배하는 가요브니체크.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해서 죽음을 택했다.



콜베 신부는 1941년 5월 28일 320명의 죄수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수용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박탈당하였고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이름조차 사치였다. 콜베 신부에게도 ‘16670’이라는 죄수 번호가 붙여졌다.



수용소에 온 것을 하느님 섭리로 여겨

수용소 안에서도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계층은 유다인들로, 그들은 보통 2~3주 안에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끔찍한 일이지만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유다인 다음으로 종교인은 정치인과 더불어 특히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곳에서 성직자 수도자라는 신분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신부들은 보통 ‘돼지’로 불렸으며 매일 가장 힘든 중노동에 투입되었고 모욕당하고 채찍질당했다. 정치인과 종교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석 달을 버티기 어렵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그들에게는 끔찍한 수용소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명은 조금 더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출구는 가스실과 화장터 외에는 없다는 점에서 먼저 죽어간 유다인들보다 오히려 더 못한 운명이었다.

콜베 신부는 벽돌과 목재를 나르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수용소 안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폐병 환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중노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작업장에서 쓰러질 때마다 무자비한 발길질과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그를 도우려 하면 그는 언제나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그렇게 하다가는 당신도 매를 맞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고 계시니 저는 괜찮습니다.”

지옥 같은 수용소 안에서 보여 준 그의 태도가 너무도 두드러졌기에, 많은 생존자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통해서 충분한 증언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증언 속에서 일관된 내용은 그가 늘 온유했으며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한 수용자는 어느 날 밤 그가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 행동은 간수들에게 처벌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며 지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여, 잠자시오, 고된 노동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소. 그러니 쉬어야 하오. 나는 이미 늙었으니 당신을 위해 기도하리다. 나는 당신들의 슬픈 수용소 운명을 나누려고 여기 온 것이오.”

그는 자신이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여겼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자신에게 목자로서의 소명이 주어졌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1941년 7월 말, 콜베 신부가 머무르던 14호 막사에서 한 명의 탈주자가 발생한다. 독일인 간수는 그를 다시 잡아들이는 데에 실패하자 연대책임을 물어 같은 막사에 있는 10명의 수용자에게 아사(餓死)형을 내린다. 처음에 콜베 신부는 그 10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가요브니체크가 눈물을 흘리며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나의 부모, 나의 아내, 나의 자식들을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라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조용히 간수 앞으로 걸어갔다. “제가 저 사람 대신 죽겠습니다.”

독일인 간수는 당황했다. 이런 일은 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간수들은 수용자를 동물처럼 대했다. 인간성을 말살했고 존엄성을 박탈했다. 남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성과 존엄성이 살아 있는 곳에서만 이따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공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지옥 같은 그곳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보고가 그 사실을 반증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독일인 간수는 수용자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그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콜베 신부는 대답한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인간이 동물화되어 버린 그 비극의 현장 한가운데서 콜베 신부만이 인간다운 품위와 주님의 사제로서의 풍모를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는 죄수복이 입혀져 있었고 이름 대신 16670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었지만, 인간다움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마침내 콜베 신부는 프란치스코 가요브니체크 대신 아사 감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희생은 단순히 프란치스코 가요브니체크 한 사람이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아사 감방이라는 절망과 어둠의 공간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무고한 아홉 명의 영혼과 함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도 목자가 필요했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신원 증명은 그러한 일이 바로 사제로서 하는 일이며 사제의 직무임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간적인 충동이나 인격적인 인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소명 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날 이후 아사 감방에서는 계속 성가와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낮에는 다른 소음으로 잘 들리지 않았으나 밤이 되면 수용소의 사람들은 아사 감방에 있는 이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과 탈진으로 그 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으며 한 명씩 한 명씩 차가운 시신이 돼 밖으로 들려 나왔다. 콜베 신부는 아사 감방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죽은 이들에게 사제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증언해야 하는 의무의 수행이기도 했다.



예수님 닮은 착한 목자

1971년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단순히 ‘16670’이라는 숫자로 불리던 이 사람은 승리보다 더 어려운 것, 즉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는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타오르는 마음으로 증오의 변증법적인 지옥 같은 굴레를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 끔찍한 마법을 몰아내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그의 증언은 갈라지고 나누어 진 사랑의 시대에 깊은 감명을 주는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1941년 8월 14일 정오, 간수들이 아사 감방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콜베 신부와 세 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었다. 그들의 앙상한 팔에 석탄산 독주사가 주사됐고 마지막 소명을 다한 사제는 그들과 함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콜베 신부의 시신은 8월 15일 아우슈비츠의 시신 소각장에서 불태워진다. 콜베 신부는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였다.









※다음 호부터는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이 연재됩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7-06-2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3. 28

시편 84장 11절
정녕 주님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으니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