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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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1) 11세기 ① - 동서 교회 분열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출현

파문의 화살 날리며 갈라진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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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은 천 년간 지속되면서 서방 교회 수호자라면서도 서방 교회를 심하게 간섭하기도 했지만, 서방 교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정치, 외교적인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도 일정 부분 담당했습니다. 11세기에 들어서서 서방 교회는 서서히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영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성화상 논쟁과 신경 정식 논쟁

11세기에 그리스도교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정치, 문화, 역사, 정서가 많이 다른 두 교회는 이미 분열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8~9세기에 두 교회는 ‘성화상 논쟁’과 ‘신경 정식(定式) 논쟁’으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성화상 논쟁은 동방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성화상 파괴론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가 성화상 공경론자들을 지지함으로써 성화상 파괴론자들이 서방 교회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787년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와 84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가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면서 성화상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성화상 파괴론자들은 서방 교회에 앙금이 남았습니다.

9세기 중반에 두 교회는 또 대립했습니다. 동로마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 제위 842~867)를 섭정하던 바르다스(Bardas, ?~866)가 자신의 부도덕성을 비난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 Constantinopolitanus, 재임 847~858; 867~877)를 사퇴시키고 친구인 포티우스(Photius Con- stantinopolitanus, 재임 858~867; 877~886)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가 사퇴를 거부하자, 포티우스는 교황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PP. I, 재임 858~867)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에까지 교황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863년에 로마 종교 회의를 열어 포티우스를 파문했습니다.

그 당시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Filioque’(성자로부터도)라는 문구를 첨가한 신경 정식을 동방 교회 지역에까지 확산시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포티우스는 동방 교회가 이단 사상으로 생각한 내용을 유포하는 것을 빌미로 86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교황 니콜라우스 1세를 파문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비잔틴 황제에 즉위한 바실리우스 1세(Basilius I, 재위 867~886)는 유럽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서방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포티우스를 해임했으며, 869~870년에 개최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포티우스를 파문했습니다.

877년에 이그나티우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유배 시절에 황실과 친분을 쌓았던 포티우스는 다시 총대주교에 복직되었습니다. 특히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비잔틴 제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교황 요한 8세(Ioannes PP. VIII, 재임 872~882)는 포티우스의 총대주교직을 승인했습니다. 포티우스는 879~88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결의한 내용을 부인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서방 교회는 이러한 조처를 묵인했지만, 양 교회 사이에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습니다.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

10~11세기에 노르만인은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Constantinus IX, 재위 1042~1055)는 교황과 동맹을 맺고 이 지역을 탈환하려 했습니다. 이에 교황 레오 9세(Leo PP. IX, 재임 1049~1054)는 1053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으나 대패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재임 1043~1058)는 이 동맹을 빌미로 교황권이 동방 교회에까지 확대될 것을 걱정하여 서방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과거 성화상 논쟁과 ‘Filioque’ 논쟁뿐만 아니라, 사제 독신제와 누룩 없는 빵을 제병으로 사용하는 것, 부활절 전례력의 차이 등 다양한 서방 교회 관습을 열거하면서 서방 교회를 비판했고, 동방 교회 지역에서 서방 전례를 따르는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시켰습니다.

이에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에 훔베르투스(Humbertus, 1000/1015~1061) 추기경을 단장으로 해서 교황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습니다. 양 교회의 화해를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가 노력했으나, 훔베르투스 추기경이 시종일관 교황 수위권을 주장하자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교황 사절단을 내쳤습니다. 이에 격분한 훔베르투스 추기경은 1054년 7월 16일에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성 소피아 성당 제단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으며, 이에 케룰라리우스 총대주교도 교황 사절단을 파문했습니다. 이로써 동서 교회는 갈라졌습니다.

물론 상호 파문교서에 허점이 있습니다.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했고, 후임 교황 빅토르 2세(Victor PP. II, 재임 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1054년 7월에 교황좌는 공석이었습니다.



성경 및 교리공부에 로마네스크 양식 활용

동서 교회 분열은 그리스도교에 뼈아픈 역사가 되었지만, 오히려 이후 서방 교회에서 영성 생활 발전에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을 주는데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의 출현이 한몫했습니다. 10세기 말엽부터 12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대 로마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조합되어 건축, 미술, 조각 등에서 나타나는 로마풍 양식을 말합니다.

두꺼운 돌벽과 반원형 둥근 아치 형태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성당은 어둡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기에, 순례객들의 기도 장소로 순례 성지에 지어졌습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성당 건축물의 일부가 되었는데, 특히 성당 외벽에 성상뿐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조각함으로써 글을 모르는 신자들도 조각을 통해 성경 말씀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강한 색채로 그려진 로마네스크 회화로 채워져서, 역시 신자들의 교리공부에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이 필사한 책에 삽화로 그려져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 교회는 평면적인 ‘이콘’ 성화만 활용할 뿐이었습니다.



성화상 공경은 성화상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화상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대상을 떠올리며 공경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동방 교회는 이단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려고 여전히 성화상 공경에 인색했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에서 자유로워진 서방 교회는 성화상을 신심 생활에 적극 활용했습니다. 문맹률이 높았던 중세 유럽 사회에서 신앙인들의 교리교육과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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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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