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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0) 12세기 ④ - 기사 수도회의 출현

칼과 십자가 들고 예루살렘 향한 외줄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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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도회의 출현은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시대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수도자들의 응답들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렸던지 대부분 지금까지 유효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응답이 변질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수도회들은 수도 서약과 군사적 임무의 조화를 꾀했지만, 일부 수도 기사단들은 수도회로서의 본질을 저버리기도 했다. 십자군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 【CNS】



성지 수호와 순례자 보호를 명분으로 출정한 십자군

중세 중기 서방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대중 신심 운동 중 하나로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비록 아랍 무슬림 세력이 7세기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지만, 서방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방해받지 않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할 수 있었고, 동방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큰 어려움 없이 신앙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수니파 무슬림인 셀주크 왕조는 1037년 중앙 아시아에 제국을 설립하고, 1071년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순례 중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을 가했습니다. 정치적 위협을 느낀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종교적인 이유를 앞세워 서방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재임 1088~1099)는 1095년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으로 제1차 십자군(Crusade) 원정(1096~1099)을 선언했습니다. 십자군 원정대는 1099년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제국을 건설해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는 성묘(聖墓)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세력이 예루살렘 제국을 위협하고 1187년 멸망시키자 서방 교회는 다시 제3차 십자군 원정(1184~1192)을 떠났으나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제6차 십자군 원정(1228~1229)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재위 1212~1250)는 외교력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했으나, 1244년 다시 빼앗겼습니다. 물론 제7차 십자군 원정(1248~1254) 및 제8차 십자군 원정(1265~1272)도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서방 교회는 1291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십자군 점령 지역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 십자군 당시의 예루살렘 지도.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수도 서약과 군사적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기사 수도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했던 십자군 원정 시절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라고 불린 특수한 수도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기사 수도회는 수도자로서 수도 서약을 하고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실천했으며, 순례자를 보호하고 성지를 수호하고자 중세 유럽 기사(騎士)처럼 무력 사용을 통해 무슬림 세력으로부터 그리스도 왕국을 지키는 군사적 임무도 함께 수행했습니다.

첫 번째 기사 수도회는 1023년 아말피공국(Ducato di Amalfi)이 예루살렘 내 그리스도인 거주 지역에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하며 설립한 아프거나 상처 입거나 가난한 순례자들을 돕는 병원을 운영하던 ‘구호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던 1099년에 원정대는 요한 병원에서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병자들을 간호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의 성 요한의 구호 형제회(Ordo Fratrum Hospitalis Sancti Ioannis Hierosolymitani)’를 발족시켰습니다. 이 형제회는 1120년 교황청 설립 ‘요한 기사 수도회’(Knights of Saint John)로 개편, 군인 수사와 간호 수사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간호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사 수도회는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이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예루살렘 도성 안 치안은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성지를 향해 오는 길목은 비적들로 들끓었습니다. 프랑스 기사 위그 드 파앵(Hugues de Payens, 1070~1136)은 1119년 순례자들을 보호할 기사 수도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동료 8명과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 터에서 성전 기사 수도회를 창설했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는 저서 「새 군사들의 찬미에 관한 책(Liber de Laude Novae Militiae)」에서 수도 서약과 군사적 임무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사 수도회 이념의 정당성을 제시했습니다.



이교도 선교로 목적을 확장한 기사 수도회

또 다른 주요 기사 수도회는 독일 사람들이 주축이 된 ‘독일 기사단(Teutonic Knights)’입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시절 예루살렘 왕국 북쪽 아크레(Acre)에 위치한 원정대를 지원」하는 야전 병원에서 1190년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의 독일 형제회(Ordo Fratrum Domus Sanctae Mariae Teutonicorum Ierosolimitanorum)’가 발족됐는데, 1198년 독일 기사 수도회로 개편되었습니다. 독일 기사 수도회 일부 구성원들은 1211년부터 이교도 선교를 목적으로 동유럽 지역으로 진출했으나, 포악한 점령군으로 변했습니다.

한편 리가(Riga)의 주교 알베르트 1세(Albert I, 재임 1199~1229)는 리보니아(Livonia) 지역의 그리스도인을 보호하고 이교도들을 선교하겠다는 목적으로 1202년 독일 군인수사들로 구성된 ‘리보니아의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Fratres Militiæ Christi Livoniae)’를 설립했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PP. III, 재임 1198~1216)는 1204년 ‘칼의 기사 수도회(Knights of Sword)’ 설립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칼의 기사 수도회는 그리스도인 보호보다 이교도 착취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결국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 치른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1237년 살아남은 수사들은 독일 기사 수도회로 편입됐습니다.

이외에도 이베리아반도에서 살았던 이슬람계 무어인(Moors)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수호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는 기사 수도회들이 설립됐습니다. 1146년 베네딕도회 규칙을 따른 포르투갈(Portugal)왕국의 ‘아비즈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 of Aviz)’, 1158년 시토회 규칙을 따른 카스티야(Castilla)왕국의 ‘칼라트라바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 of Calatrava)’와 1166년 레온(Len)왕국의 ‘알칸타라 기사 수도회(Order of Alcntara)’, 1170년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사제단 규칙을 따른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칼의 성 야고보 기사 수도회(Military Order of Saint James of the Sword)’가 설립됐습니다. 뒤늦은 1317년 시토회 규칙을 따른 아라곤(Aragon) 연합왕국의 ‘몬테사 기사 수도회(Order of Montesa)’도 설립됐습니다.



1291년 십자군 원정대의 마지막 주둔지였던 아크레마저 무슬림 세력에 함락당하자 여러 기사 수도회들은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요한 기사 수도회는 몰타 기사 수도회(Knights of Malta)로 재편해 병자를 돌보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설립 목적을 상실함으로써 1312년 빈(Vienne) 공의회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PP. V, 재임 1305~13014)가 해산시켰습니다. 독일 기사 수도회는 그리스도교를 전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면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 수도회로서의 본질을 저버렸습니다. 그 외의 기사 수도회도 수도회 모습을 상실하고 왕족과 귀족에 속한 기사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교회 안팎에서 많은 결과를 가져왔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영적인 응답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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