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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1)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두 성인과 함께 방 쓰며 우정과 신앙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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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브르 신부


예수회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원 세 명을 선택한다면, 아마도 이냐시오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베드로 파브르 성인일 것이다. 세 성인은 여러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냐시오가 회심한 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했을 때 파리 대학에서 함께 방을 사용했던 동료들이 바로 하비에르와 파브르이다. 1529년 생트 바르브 대학의 학기가 시작하면서 하비에르와 파브르가 사용하고 있던 방에 이냐시오가 새로 들어왔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이들보다 15살이나 많았다. 세 사람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우정과 서로에 대한 학문적 격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동료들을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함께 키워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40년 예수회의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예수회가 인가를 받은 후 수도회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세 성인은 각자 고유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동료들의 리더로서 그리고 예수회의 설립자로서 이냐시오는 예수회의 가장 중요한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나는 「영신수련」이고, 다른 하나는 「회헌」이다. 하비에르는 아시아의 선교사로서 이룩한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교회 안팎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파브르는 이냐시오로부터 영신수련을 가장 깊게 살아가는 회원으로 인정받았으며, 동시에 유럽의 다양한 곳에 예수회 공동체의 초석을 닦았다. 그는 교회 안에서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와 일치에 헌신하였다.
 

세 성인의 차이점은 이냐시오와 하비에르가 선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품에 올랐지만, 파브르는 500여 년이 지난 2014년에서야 성인품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 파브르 신부를 성인품에 올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예수회원들은 “마침내!”라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지?”라고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가 교회의 아들로서 그리고 예수회원으로서 여러 가지 탁월한 면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묻혀서 드러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이냐시오와 하비에르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조용하고 겸손한 성품 때문일 수도 있겠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월 3일 로마 제수 성당에서 거행된 파브르 성인 시성 감사 미사에서 2006년에 베네딕도 16세 교황이 파브르 성인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은 겸손하고 섬세한 사람으로서 삶의 내적 깊이가 있으며 어떤 부류의 사람과도 친구가 되는 재능을 선사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교황의 말처럼 파브르 성인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전 유럽을 휩쓸던 분열과 갈등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저서 「영적 일기」를 통해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가르쳤다.
 

파브르는 1506년 프랑스 동남부에서 이탈리아 서북부에 자리한 사부아 지역의 르 그랑보르낭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세례를 이렇게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나는 1506년 부활 시기에 르 그랑보르낭에 있는 빌라레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르 그랑보르낭은 당시 전체 인구가 가톨릭이었던 제네바 교구에 속했다.”
 

르 그랑보르낭은 험준한 알프스 산악지역이었다. 파브르가 자란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파브르 가족이 가장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사부아 지역 사람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톨릭 신자들이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강직하였다. 파브르의 고향 마을에 대한 보고서 중에서 사부아 사람들을 적절히 잘 표현한 대목이 있다. “사부아 사람들은 겸손하고, 신심이 깊으며, 마음이 강직하고, 매우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 남자들은 비록 키가 크진 않지만, 체격이 좋았다. 그들은 아주 튼튼한 치아를 갖고 있었고, 잘생겼으며, 건강해 보였다. 대화를 나눌 때에는 생기 있고 활기찼지만, 평상시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온화한 그들의 얼굴은 마치 조각상처럼 매우 영성적이었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들은 굳건해 보였고, 조용하며, 사색과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파브르의 유년 시절을 보면 사부아의 이러한 면들을 엿볼 수 있다. 파브르의 고향 마을은 알프스의 산악지대였다. 그래서 눈이 녹아내리는 5월이 되면 가족 중의 한 명은 농장의 동물들을 알프스의 녹지로 이동시켜서 혼자서 돌봐야 했다. 파브르는 1513년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 몇 주 되지 않아 처음으로 동물들을 데리고 고산 지대의 목초지로 갔다. 그는 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과 위험들을 대면하고 살아갔다. 갑작스레 다가올 폭풍의 징후를 읽을 수 있어야 했고 조난과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알아듣고 대응해야 했다. 맹수들의 공격에 대항해서 동물들을 보호해야 했다. 즉 그는 어려서부터 산에서 겪어야 하는 다양한 어려움과 위험들에 맞서 올바르고 신속한 판단과 용기, 책임감을 키울 수 있었다.
 

파브르와 가족들은 여느 사부아 사람들처럼 신앙이 깊었다. 그의 아버지 루이 파브르와 어머니 마리 페리생도 모두 르 그랑보르낭 출신이었다. 파브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부모님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나를 키우신 좋은 분들이셨으며,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셨다”고 말하고 있다. 파브르 자신도 동물들을 몰고 가면서 염소 젖을 짜고 있는 이웃을 만나면 습관처럼 “하느님과 비르지타 성녀가 당신을 도와주시길”이라며 인사했다. 이처럼 신앙은 파브르의 일상생활 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김치헌 신부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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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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