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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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나의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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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없이 사랑으로 받아주기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없습니다. 싱싱한 회를 먹습니다. 그런데 간장이나 고추냉이(일본어 와사비)가 없습니다. 아마 고기나 회만을 먹기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고기와 회의 맛을 더욱더 돋우는 것은 바로 소금, 간장, 고추냉이 등이지요. 그렇다면 고기나 회 없이 소금, 간장, 고추냉이 등만을 먹게 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힘듭니다. 소금과 간장은 너무 짜고, 고추냉이는 너무 맵기 때문입니다.

소금, 간장, 고추냉이 등은 비록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 없지만, 음식과 함께 어울렸을 때에는 그 음식의 맛을 최상으로 만듭니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혼자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정말로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사람 역시 내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러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함께할 때, 나의 가치가 더욱더 높아질 때가 많았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만 가까이하는 사람과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의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가치가 더 높아 보입니까?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고, 진정으로 당신을 믿고 앞으로 용기 있게 나온다면 큰 사랑을 전해주십니다. 이 사랑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만진 세 가지 이유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을 멀리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레위 13,46 참조) 따라서 나병과 같은 병에 걸렸을 경우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고 만져도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서 나병 환자는 치유해주시지요.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지하는데도 나병 환자를 만지셨을까요? 사실 말로만으로도 충분히 나병 환자는 고쳐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치유의 은총을 얻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손을 댄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종속되어 계시지 않고 오히려 율법 위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보다 율법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로써 하느님의 사랑도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둘째, 나병 환자가 지닌 육신의 상처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거나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서 무조건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용기 있는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를 뚫고서 예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이 용기 있는 믿음에 주님께서는 손을 대시면서 응답해주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깨닫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무조건 배척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서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베푸는 사랑입니다. 분리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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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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