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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칼 라너 (5)

교회 정통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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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칼 라너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통해 교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라너에게 교회는 분명 거룩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바탕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교회는 아울러 죄스러운 인간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라너는 ‘성직 파시즘’(Klericofaschismus)이라는 교회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 후에 새로이 쇄신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죄성을 신학적으로 숙고했다. 1947년 「죄인의 교회(Kirche der Snder)」, 1954년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의미(Theologische Bedeutung der Position des Christen in der modernen Welt)」, 「성령을 끄지 마시오!(Lscht den Geist nicht aus!)」를 발표했다. 주교들은 이에 거세게 반응했다.

1950년 성모 승천 교리가 반포됐다. 칼 라너는 이에 대한 반대 논문을 쓰려 했다. 이 교리는 교양 있는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교리를 이해시키려면 교의 발전의 정당성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근거가 매우 중요하다. 성모 승천에 관한 교리는 라너가 보기에 성경의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라너가 마리아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아론을 인간학적으로 접했다. 그는 먼저 공심판 이전의 인간 부활을 성경적으로 탐구했다. 예수의 십자가상 위로 어둠이 덮친 것은 종말론적인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지진이 일어났다.(마르 13,8.24) 이는 예수의 죽음으로 죄와 죽음의 옛 세상이 함께 몰락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시작된다.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성경은 증언한다.(마태 27,52) 이는 예수의 죽음은 곧 종말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고 예수의 죽음과 함께 이미 인간 영육의 완성이 이뤄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이는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에 의해 완성되고 받아들여진다.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인간학ㆍ그리스도론ㆍ종말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간들의 종말론적 구원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성모 승천 교리 선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교황청의 시각에서 볼 때 라너의 마리아론은 마리아의 독특한 구원적 위치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에 인간의 부활이 이루어진다”는 라너의 인간학ㆍ종말론적 숙고는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만의 완성의 독특성은 사라지고 만다.

라너는 이러한 문제를 논문으로 출판하려고 했다. 393쪽에 이르는 그 논문 제목은 「오늘날 마리아론의 문제들(Probleme heutiger Marioligie)」인데 1951년 당시 관구장이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회 서적을 출판할 때는 출판 검열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관구장이 위촉한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기초신학자 다니스(E. Dhanis)가 라너의 논문에 부정적으로 판결을 내렸기에 그의 논문은 결국 출판될 수 없었다.

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도 숙고했다. 그는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잉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라 동정 출산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고자 했다. 동정 출산이란 예수의 삶의 시작과 동반하는 개념으로 예수라는 인물은 단지 성령에 의해 예언자로 불린 존재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즉, 동정 출산을 통한 예수의 삶의 시작은 자신을 통해서 더 능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현재화(Vergegenwrtigung)한다. 그래서 하느님 자신이 예수의 아버지인 것이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단지 출산 이전의 동정성(Virginitas ante partum), 출산 중의 동정성(Virginitas in partu)을 가르치고 있는데 출산 중의 동정성은 사실 성경의 근거가 있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는 2세기에 출현한 「야고보 복음」(당시에는 영향력이 있었던 외경)이 언급하는데 출산 중 마리아의 처녀막은 훼손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교부들은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로 이해했다. 새로운 하와는 죄의 상태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와는 반대로 출산의 고통(창세 3,16)이 없었다고 교부들은 이해했다. 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 원죄의 관점보다는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는 마리아의 출산을 하느님 언약에 대한 전적인 수용 행위라고 본다.(루카 1,38) 그렇기에 마리아의 출산은 일반적인 고통 중의 출산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산고는 비구원적 상황의 표현이다. 고통은 근본적으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됨으로부터 온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은 단지 육체적 고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원적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출산은 이러한 비구원적 상황에 빠진 세상에서 은총이 가득함(루카 1,28)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언약을 전적으로 수용했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전적으로 투신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전적으로 긍정했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된 경험이 없는 것이다. 즉, 마리아의 출산은 하느님과 마리아의 구원 공동체를 이루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출산 중 동정성이란 육체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학ㆍ구원론의 관점, 즉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전적인 긍정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생물학적 질문에 성서가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에 대해서는 개방된 태도를 지녀야 한다.

교황청은 이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율리우스 되프너(Julius Dpfner) 추기경이 탄원해 라너는 정직을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성사에 대한 공의회 신학 준비위원회 자문으로 위촉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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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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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3장 9절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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