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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8·끝)

아시아로 흘러간 밀알 한 알이 10만 열매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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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이 인도 고아 봄 예수 대성전에 안치돼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유해를 참배하고 있다.

▲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하비에르는 로마의 동료들에게 그리고 이냐시오에게, 시망 로드리게스와 포르투갈 왕 주앙 3세에게 편지를 썼다. 동료들에게는 일본의 선교활동을 알렸다. 이냐시오에게는 일본 미야코의 대학들에 지성적, 영성적으로 출중한 예수회원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다. 일본과 중국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지리적으로도 가깝다고 전했고,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평화로운 동시에 수준 높은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호평했다. 그리고 시망 로드리게스에게 함께 중국에 가서 선교하자고 초대했다. 하비에르의 마음은 이미 중국에 가 있었다.

하비에르는 1552년 1월 인도 고아로 올라왔다. 베르나르도와 마태오를 성 바오로 대학에 입학시켰다. 예수회와 특히 선교지에 적합하지 않은 회원 여섯 명을 퇴회시켰다. 발타사 가고(Baltasar Gago) 신부에게 일본 선교를 잇게 하고 하비에르 자신은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비에르 일행은 1552년 4월 17일에 인도 고아에서 페레이라의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출항했다.

하비에르 일행은 1552년 5월 말 믈라카에 도착했다. 하비에르는 6월 6일 발타사 가고 신부를 일본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중국 선교를 위해 하비에르 자신은 교황 대사 자격으로, 그리고 인도 총독의 임명을 받은 디오고 페레이라는 포르투갈 왕의 대사 자격으로 중국 황제를 만날 계획을 세우고 믈라카를 떠났다.

그러나 항해 후 얼마 되지 않아 교황대사 자격을 증명하는 편지를 잊고 와 다시 믈라카로 돌아갔다. 믈라카에서는 당시 포르투갈령 인도 해상권을 쥐고 흔들던 포르투갈 선장 알바로 곤잘베스 데 아타인즈 다 감마(lvaro Gonalves de Atade da Gama)가 산타 크루즈호를 가만두지 않았다. 알바로 선장은 교황대사 증명 서신이 없는 하비에르를 교황대사로 인정하지 않았고, 페레이라에게는 포르투갈 왕의 대사에서 사임하라고 종용했다. 산타 크루즈호의 선원 25명을 그가 선발한 사람으로 대체했고 선장도 아폰소 데 로야스(Affonso de Royas)로 바꾸었다. 그리고 하비에르가 페레이라에게 부탁해 구입했던 중국 황제에게 바칠 진상품들을 하적하여 믈라카에 두고 떠나라고 했다.

하비에르는 분개하여 6월 인도의 총대리 주앙 소아리스(Joo Soares) 주교에게 알바로 곤잘베스 선장을 처벌할 것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페레이라에게는 6월 25일 자로 편지를 보내 사과하면서 포르투갈 왕에게 요청하여 배와 기물들의 손실을 배상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탄원은 답이 없고 일 처리는 더뎠다. 몬순이 끝나가고 있었다. 몬순을 지나면 동쪽으로 항해하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하비에르는 하는 수 없이 서둘러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계속 항해하기로 했다. 7월 21일 믈라카 해협을(현 싱가포르 해협) 지나다 잠시 정박했다. 거기에서 다섯 통의 편지를 썼다.

산타 크루즈호는 그해 8월 말에 샹추안 섬에 도착했다. 하비에르는 예수회 지원자 알바로 페레이라(Alvaro Ferreira),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중국인 친구, 크리스토퍼라고 불리던 인도 믈라바 출신의 시종 한 명과 함께 섬에 올랐다. 밀무역자들과 사기꾼들이 들끓었다. 하비에르는 예수회 지원자 페레이라를 인도로 돌려보냈다. 샹추안 섬의 상인들을 수소문하여 중국 광둥 항으로 일행을 데려다 줄 배를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공식적인 입항이 아니기에 아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11월 중순, 중국인 한 사람이 대륙에 가서 거금을 환전해 줄 수 있다고 해서 돈을 쥐어 중국으로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

11월 21일 열병이 하비에르를 덮쳤다. 하비에르는 해안가 초막에 누워 중국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중국으로 데려다 줄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안토니오가 하비에르를 내내 간호했다. 11월 28일 하비에르는 의식을 잃었다가 12월 1일 잠시 의식을 회복했다. 12월 3일 이른 아침 중국 본토까지 고작 14㎞의 뱃길을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46세였다.

하비에르의 선종 소식을 담은 편지는 1555년 2월이 되어서야 로마의 예수회원들에게 전해졌다. 로마를 떠나 인도, 일본을 거치며 복음을 전파하고 중국 선교를 위해 샹추안 섬까지 오는 데 12년이 걸렸고, 부고를 알리는 편지가 로마로 돌아가는데 2년 반이 걸렸다.

하비에르가 헤쳐 온 바다는 멀고 험했다. 하비에르가 시작했던 중국 선교는 31년 뒤 1583년 9월 마태오 리치가 광둥 항에 도착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하비에르는 극동의 첫 번째 선교사였다. 그는 1542년 이래 10년 6개월 동안 약 10만 명에 이르는 이교도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다. 동양 선교에 관한 그의 편지들은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켜 선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1614년 예수회 총장 클라우디오 아콰비바가 하비에르의 오른손을 로마에 있는 제수성당에 안치하도록 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하비에르가 인도와 일본에서 보여준 태도는 그 지역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선교 적응주의의 초기 단계로 훗날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비에르는 1619년에 시복됐고, 선종 70년 만인 1622년 3월 12일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에 의해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되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동안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을 써주신 집필자와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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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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