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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39) 오늘로 충분한 삶, 잘 죽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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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요?”

안색도 좋지 않고 말도 적어진 B씨는 퀭한 눈에 슬픔이 가득 차 보였다.

“일은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라며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B씨는 폐에 이상이 있다는 통보를 받고 재검진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불안과 초조로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것이다. 몇 달이 지났을까? B씨를 다시 만났다. 궁금했다. 하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그때 폐에 이상이 있다고 재검진을 받으라고 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상’이라는 통보를 받았어요.” 나는 너무 다행이다 싶어 손뼉 치며 축하해주자, 그는 멋쩍어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생각할수록 부끄러워 죽겠어요. 확실하지도 않은데 세상 다 끝난 사람처럼 날마다 땅을 보며 한숨만 지었다니까요. 지나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어찌나 한심하고 실망스러운지 화가 날 정도예요. ‘내가 헛살았구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한 거야’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도대체 죽음이 뭐기에…” 하며 흐려지는 목소리에서 그의 묵직한 성찰이 느껴졌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 누구도 예외 없다. 막상 그 대상이 ‘나’라는 걸 안 순간 삶에 대한 애착은 더 커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저항한다. 그렇다. 나에게 죽음만은 예외일 것 같다. 아니 예외여야 할 것 같다. 죽음은 지금이 아닌 먼 미래의 일이어야 하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을 모르니 두렵다. 두려우니 더 피하고 싶다. 내 삶의 끝에 있는 죽음은 늘 분리된 그 무언가다. ‘언젠가 나도 죽지’라고 하지만 막상 내가 ‘언제’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는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고통스러워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의 병이 말기 암으로까지 갈 정도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동안 더 사랑하지 못했던 아쉬움,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없는 무기력이 아직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막연한 희망만 주다가 이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크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영상을 보여주면서 어려운 의학용어로 시한부를 알린 병원 측에 대한 원망도 크다. 우리는 내일 죽을 수도 있고 내년에 죽을 수도 있지만 삶의 한계를 안다는 그것이 곧 절망이고 죽음이었다.

사실 병원에서도 처음에는 ‘잘 치료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병원에서도 놀랄 정도로 어머니는 환자 같지 않았다. 하지만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어머니는 바로 세상을 떠났다. 가을날의 메마른 나뭇잎처럼 어떤 저항도 없이 그냥 가 버리셨다. 나는 한탄했다. ‘왜 시한부를 알려야 했을까? 그저 ‘오늘’만 바라고 ‘오늘’로 충분한 삶을 살면 될 것을.’

죽음은 삶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나와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의 구별 없이 살다 보면 죽음을 삶처럼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매일의 삶을 뒤돌아볼 여유가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삶에서 깨어있지 않고 어떻게 죽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기도해야겠다. 기도와 묵상은 나의 몸과 영혼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불러들인다. 일감을 깊숙이 밀어 넣고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처럼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자. 기도는 작은 움직임과 미세한 떨림마저 살아있음을 행복하게 해준다. 고요한 멈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없애주니까. 가끔은 죽음이 행복한 의식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오늘로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성찰하기

7 오늘 하루 중 과거로 방문하는 데 어느 정도의 에너지와 시간을 썼나요?

8 오늘 하루 중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어느 정도의 에너지와 시간을 썼나요?

9 오늘 하루 중 이 두 가지를 고민하느라 어느 정도의 에너지와 시간을 썼나요?

단지 오늘만으로 충분한 하루를 살다 보면 죽음도 삶이 되지 않을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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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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