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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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5) 사울의 회심(9,1-19ㄱ) <2>

박해자 사울,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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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사흘 동안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있을 때에 다마스쿠스에 사는 하나니아스가 환시 중에 주님 말씀을 듣고 사울을 만나러 갑니다. 사울의 회심 두 번째로 이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울의 만남(9,10-19ㄱ)
 

다마스쿠스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이름은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또는 “주님께서는 들어 주신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다른 많은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였습니다.(9,10)
 

하나니아스가 환시 중에 주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입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9,11-12)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또한 같은 시각에 사울에게도 환시를 보게 해 주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라는 표현이 이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환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하나니아스는 타르수스 사람 사울이라는 말에 난색을 표합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9,13-14)
 

하나니아스의 이 말은 하나니아스를 비롯해 다마스쿠스에 사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왜 다마스쿠스에 와 있는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만큼 사울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두려움 또는 적어도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니아스의 망설임에도 주님께서는 거침없이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것이 둘째 부분입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9,15-16)
 

이 말씀은 당신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박해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려고 다마스쿠스에 온 장본인을 주님께서는 당신 도구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앞으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곧 예수님을 위해서 숱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반전을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서 바오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의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사울은 다시 보게 됩니다.(9,17-18)
 

하나니아스는 이제 박해자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안수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안수 행위는 직무를 맡기고(6,6), 성령을 베풀며(8,17; 19,6), 병자를 치유하고(28,8), 사명을 수행하라고 파견하는 일(13,3)과 관련됩니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안수함으로써 사울을 다시 보게 할 뿐 아니라(치유),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성령의 부여).
 

사울은 다시 보게 되자 일어나서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9,19ㄱ) 세례를 받은 다음에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보통인데(8,16-17) 사울은 성령과 치유의 은사를 받는 안수를 먼저 받고 나서 세례를 받습니다.


생각해봅시다


하나니아스의 말 중에서 “주님의 성도들”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성도들” 곧 “거룩한 무리들”이란 표현은 “신자”(2,41.44; 4,32; 5,14), “제자”(6,1.2.7; 9,1.10)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새로운 길”(9,2)를 따르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는 자신을 비롯해 주님을 믿는 이들, 곧 주님의 제자들을 “거룩한 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래서 미사 중에 우리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은 가장 완전한 거룩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의 거룩함을 모상으로 지닌 거룩한 이들입니다. 이 거룩함은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벗어난 철저한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가 얼마나 죄가 없느냐, 또 죄를 짓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행하려고 노력하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는 사울이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아룁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하나니아스는 지체없이 일어나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박해한 그 사울에게 가서 “사울 형제” 하고 인사합니다. 두렵고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님의 제자인 하나니아스는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성도임을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를 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복음을 철저히 박해하던 한 유다인이 복음의 열렬한 증인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로 변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회심을 넘어서는 위대한 시작입니다. 그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니아스와 사울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릇’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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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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