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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90,끝)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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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장례식장을 한 번 상상해 보는 것은 하루 하루를 살면서 죽음과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CNS 자료 사진



“놀이터 가서 놀래?” 20개월 된 종손녀 하임이는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참 좋아한다. ‘놀이터’라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신나서 손을 마구 흔들어대며 나가려 한다.

“그런데…” 하며 이어지는 엄마 말에 뭔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느낌을 받았는지 금세 얼굴을 찡그린다. “엄마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 그러니 할머니와 함께 놀면 어때?”

순간 아이 입술은 삐죽삐죽 아래로 처지더니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냐, 아냐…. 하..암..께.. 하..암..께” 하며 급기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겨우 말을 배워가는 아이는 가지 말라는 ‘아냐’와 같이 놀자는 ‘함께’라는 두 단어만으로 이 사태를 막아보려고 온갖 애를 쓰면서 ‘아냐, 함께’를 주문 외우듯 반복하면서 울어댔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아이가 우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아이로서는 엄마가 사라지는 분리 불안에 엄청난 공포의 순간일 텐데 말이다. 아이의 눈에 가득 차오르는 수정 같은 맑은 눈물을 보노라니 가슴이 벅차고 설레었다. 신비로운 아기의 생명력이 내 존재를 흔들어 깨우면서 행복감이 몰려왔다.

아기는 자신의 세상이었던 엄마의 자궁에서 밀려 나오면서 한 몸이었던 엄마와 죽음과 같은 이별을 경험했다.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으리라. 자신의 안식처를 잃고 탯줄마저 끊기는 공포 체험이다. 어쩌면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대한 기억이 몸에 심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몸이 먼저 반응을 하나보다.

아기가 세상에 나온 날,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생명의 탄생일이지만 태아에게는 슬픈 이별과 상실의 순간이다. 태아에게 이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어둡고 두려운 미지의 세상이다. 저 세상에서의 죽음이며 이 세상에서의 탄생이다. 아기는 이 세상에서 생명력을 키우기 위해 넘어지고 일어서고 헤어지고 만나면서 숱한 상실감에 수많은 이별을 한다.

나 역시 자궁처럼 익숙하고 엄마처럼 사랑하는 이 세상을 반드시 떠나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 너머에 있는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 아기가 원해서 자궁의 세상을 떠나오지 않았듯이 나 역시 원의와 상관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알 수 없는 죽음의 터널에서 공포와 불안감에 떨 것이다. 아기처럼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아냐, 함께’를 외치며 저항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아이의 고통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듯이 죽음 너머에서 기다리는 주님께서 나를 또 그렇게 사랑스럽고 가슴 벅차게 바라보며 맞이할지도 모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울지만, 그분은 태양처럼 밝은 미소로 행복하게 나를 맞이할 것이다.

울음은 웃는 것만큼 자연스럽듯 죽음 역시 삶만큼이나 행복할 것이다. 아기는 엄마와의 이별 앞에 울었지만, 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앞에 웃고 싶다. 하느님의 얼굴과 마주한 행복한 연인처럼 말이다. 그렇기 위해 매일 죽음을 준비해야겠다. 죽음을 자주 생각하고 기억하는 일은 삶을 더 생동감 있게 만들어준다. ‘죽음’ 앞에 미움도 질투도 인정도 욕심도 소유도 그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잘 죽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죽음 때문에 생명은 빛나고 생명 때문에 죽음은 신비롭다. 생명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곧 죽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이 또 산다는 것 아닐까?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1코린 15,31)



성찰하기

1.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나의 장례식을 상상해요. 내가 사랑하는 가족, 형제, 이웃, 동료들이 모여 있어요.

2. 나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랑하는 사람들을 둘러봐요. 난 그들에게 어떤 영향과 도움을 주었을까요?

3. 그들이 나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주기를 바라나요? 이 대답이 내 삶의 지침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연재를 마치며

‘살다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당연한데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때론 매주 글을 쓰는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안에서 버겁기도 했지만 마음의 씨앗이 꼬물꼬물 올라오고 꽃을 피우는 의미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사랑해주신 독자 분들께 주님의 축복을 빌며 진심으로 감사인사 전합니다. ‘살다보면’ 또 만나겠지요?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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