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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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40) 이코니온과 리스트라 선교(14,1-18)

“헛된 우상 버리고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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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쫓겨난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은 이코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박해를 피해 리스트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진은 오늘날 이코니온(콘야) 도시 전경.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난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은 이코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다시 반감을 품은 유다인들의 공격을 받아 리스트라 근방으로 피해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이코니온 선교(14,1-7)
 

이코니온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동남쪽으로 150㎞ 남짓 떨어진 내륙 도시로,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들어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유다인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믿게 되었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14,1) 이 구절의 ‘그리스인’은 순수한 그리스 사람이라기보다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살던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곧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코니온에서도 믿기를 거부한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자극해서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만듭니다.(14,2)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담대히 설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주시어 당신 은총에 관한 그들의 말을 확인해 주셨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14,3) 마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통해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5,12)
 

이 대목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형제들”이란 표현인데, 이 형제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뿐 아니라 이들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엔 아랑곳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믿음을 북돋아주고자 오랫동안 머물면서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지요.
 

이렇게 되자 이코니온 사람들은 유다인 편을 드는 사람들과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 편을 드는 사람들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은 합세하여 사도들을 괴롭힐 뿐 아니라 돌을 던져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를 알아챈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프리기아 지방을 벗어나 리카오니아 지방의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지요.(14,4-7) 리스트라는 이코니온에서 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도시입니다. 하룻길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리스트라 선교(14,8-18)
 

리스트라에서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그를 보고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지요.(14,8-10) 이 일화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있던 태생 불구자를 고친 이야기(3,2-8)와 흡사합니다.
 

바오로가 태생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을 본 군중은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르나바를 제우스, 바오로를 헤르메스라고 부릅니다.(14,11-12)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최고 신이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사신(使臣) 역할을 하는 신 또는 언변(言辯)을 관장하는 신이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기들을 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합니다. 군중이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알아듣지 못하는 그 지방 사투리인 리카오니아 말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가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두 사람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할 때 그제야 두 사람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는 군중 속으로 뛰어들며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하고 외치면서 설득해 겨우 말립니다.(14,13-18)  자기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분노나 슬픔을 나타냅니다. 유다인들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을 경우 옷을 찢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때 대사제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자기 옷을 찢은 행위가 여기에 해당하지요.(마르 14,62-63)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기들을 신으로 모시려는 군중의 행위에 질겁해서 옷을 찢으며 말린 것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 군중에게 한 말을 좀 더 살펴봅니다. 두 사람은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라면서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파합니다.(14,15) 말하자면 제우스니 헤르메스니 하는 헛된 우상을 버리고 만물의 창조주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14,16) 이 말은 하느님께서 유다인이 아닌 다른 모든 민족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살아가도록 용인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에게는 당신을 직접 계시해 주셨지만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다음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14,17) 이 말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당신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지 않았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삼라만상의 자연법칙을 통해 간접적으로 당신을 알아보는 길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겨우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


1. 리스트라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군중을 말리면서 한 연설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삼라만상을 통해, 자연을 통해 당신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시도한 방법 곧 유교의 가르침을 보완한다는 보유론(補儒論) 방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두고두고 곱씹어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2. 리스트라의 설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설교는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는 바오로가 아테네에 갔을 때에 좀더 폭넓은 형태로 완성됩니다.(17,22-31)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t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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