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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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뉴 노멀 시대와 성령의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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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노멀’(New Normal). 새롭게 보편화된 사회·문화·경제적 표준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수습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 방향을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될 국면에 다다랐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뉴 노멀 시대’의 도래는, 어쩌면, 기존의 ‘정상’적 삶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었는지를, 얼마나 많은 과잉과 가식, 위태로움을 품고 있었는지를 역으로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아닐까 합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우리의 일상을 주도해왔던 경쟁적 소비와 인간의 상품화, 그로 인한 ‘피로사회’가, 실은 우리 스스로 초래한 모순이며 빈곤임을 똑똑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본문들은 온통 ‘새로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 복음의 맥락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념한 유다인들의 3대 순례 축제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는 밀 수확을 감사드리는 농경사회의 축제로 ‘맥추절’이라 불렸는데, 무교절을 지낸 후 7주간 후에 지낸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 사이에는 점차 ‘오순(五旬)절’(히브리어 ‘샤부오트’)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는데, 무교절 후 7주간이 지나 50일이 되었을 때 축제를 지내기에 붙은 명칭입니다. 이렇게 풍요로움을 감사하는 유다인들의 축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더욱 그 충만함을 배가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의 오순절 축제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봉독되는 성경 본문은 언제나 동일하므로, 왜 성령을 ‘바람’ 혹은 ‘숨’의 이미지로 표현해왔는지, 고대로부터 바람과 숨이 왜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작년 말씀묵상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제시된 ‘소통’(제1독서에서 강조된 각자의 언어를 모두 자기말로 이해하고 알아들음)과 ‘일치’(제2독서의 각 지체가 하나의 몸을 이룸)에 대해서도 작년 내용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묵상은 복음에 집중하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은 성령을 받게 되는 상황과 그 경위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각각의 표현들은 매우 깊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동일한 날, 바로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이었습니다. 부활은 매우 이른 아침에 발생하고 성령을 받은 일은 그날 저녁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안식일(주간 마지막 날) 전통과 비교되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주일, 주간 첫째날)을 부각시킵니다.

2)굳게 잠긴 문: 예수님의 처형 이후 제자들은 모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굳게 잠겨있던 문’은,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되는데, 문이 아무리 굳게 닫히고 잠겨있었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은 이러한 장애를 쉽게 넘어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3)제자들 가운데 서심과 평화의 인사: 평화의 인사는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 ‘샬롬’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샬롬’(평화)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것이 충만해져 더 이상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작년 연중 14주일 말씀묵상 참조) 이러한 인사를 제자들에게 건네셨다는 것은 이제 완성과 충만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라는 표현은 이렇게 충만한 ‘샬롬’이,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서실 때에만 가능한 은총임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4)상처를 보여주심: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심으로써 부활이 단순히 환영이나 상상이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절)고 합니다. 상처를 온전히 유지하고 부활하셨다함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임을 알려줍니다.

5)성령을 불어 넣어주심: 성령을 받음은 두 번째 평화의 인사 직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21절)라고 하시고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숨을 불어 넣으시는 모습은 창세 2장 7절에 등장하는 아담의 창조를 연상시키는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인간이 신비로운 이유는 하느님의 숨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6)죄의 용서: 하느님의 숨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의 성령을 그들의 존재 안에 받은 것이기에, 이제 하느님의 권한 즉 용서의 권한까지 받게 됩니다.(23절) 이는 제자들에게 전권이 주어진 것과 예수님의 권한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지속됨을 선언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이고,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숨으로 우리는 새로움에 초대되는데, 사실 성경이 제시하는 ‘새로움’이란 우리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미지의 낯선 현실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은 생명에로 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고 그분의 창조도 이미 완전했기에 더 이상의 ‘새 것’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새 것’으로 창조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탐욕과 원죄로 퇴색되고 ‘헌 것’이 되어버린 상처와 자국들을, 성령의 ‘숨’을 통해 본래의 ‘새 것’으로 다시 복원하는 것이 ‘새로움’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뉴 노멀의 시대’로의 진입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피폐해진 지구와 인류를, 보시니 좋았던 바로 그 창조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인간이 보존하고 지켜내야 할 본연의 존엄과 가치들을 우리 삶의 중심에 다시 질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덜 경쟁하고 덜 소비하며 덜 투쟁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하며 더 생존할 수 있습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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