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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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원죄로 말미암은 불행인가 하느님의 풍요로운 축복인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ㆍ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교회와 노동 (1)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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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용 신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잠자는 것과 일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우선순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유한 이든 가난한 이든, 어른이든 어린이든, 우리는 모두 24시간이라는 공평한 시간을 사용한다. 그중 상당 부분을 일하며 보낸다. 나머지 시간은 일하기 위해 준비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생의 대부분을 일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다녔던 어떤 학교에서도 ‘왜 일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더 일을 잘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했을 뿐, 정작 일을 하는 가치와 의미 등은 고민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인간은 왜 노동을 하는가? 눈치가 빠른 분이라면 갑자기 단어가 바뀌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분명 앞에서는 ‘일’이라 표현했지만, 갑자기 ‘노동’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일과 노동은 의미상 큰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이라 표현했을 때는 일상의 단어 같았지만,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경직되고 불편하고 심지어 이념적인 이미지로 곧장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근로’라는 말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근로자의 날, 근로기준법, 근로 시간 등 노동에 대한 거부감에서 노동은 점점 언급되지 않았고, 그 결과 노동의 풍요로운 가치는 소외되고 왜곡되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에게 노동은 근본적인 실존의 문제다.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기계나 노예처럼 살아가는 숙명으로서 노동을 보는 사람에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노동의 의미를 축복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힘들고 고단한 것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노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한결같이 노동의 풍요로움을 선포한다. 창세기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노동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노동자로 표현한다면 너무나 어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신앙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 그러니까 첫날부터 엿새 날까지 세상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은 분명 일하시는 하느님이셨다. 이는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는 표현에서 더욱 장엄하게 선포된다. 그리고 이제 그 하느님의 사업이 하느님을 닮아 그분의 모상성을 간직한 인간을 통해, 세상을 더욱 이롭고 아름답게 해 나아가는 것으로 노동을 소개한다. 즉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하신 하느님의 명령은 인간을 하느님 창조의 파트너로 세우신 것이며, 노동은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를 지속하게 하는 거룩한 행위로서 모든 피조물을 가꾸고 돌보는 의미를 간직한다.



노동, 과연 형벌인가

하지만 오랜 시간 노동의 풍요로운 의미가 주목받지 못하고 원죄로 말미암은 형벌로 인식되었다. 바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인간에게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고 하신 말씀을 단순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노동에 노고(勞苦)가 따름을 표현한 것일 뿐, 노동 자체가 형벌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노고는 노동과 구분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일 뿐이다. 분명 인간은 하느님처럼 일하며,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노동을 통해 지속하도록 거룩한 사명으로 초대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한 노동도 분명 강요된 노동, 강제된 노동일 때는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왜곡된 노동으로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도 세우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탈출기는 이를 분명히 보여 주는데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노동이 인간에게 강요되고 노동의 과정과 결과에서 인간이 소외될 때가 우리 삶에서 고통의 순간임을 알고 있다.



신약에서 전하는 노동의 가치

신약성경은 구약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보여 준다.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다. 예수님은 평생을 목수로 사신 노동자였다. 그분의 제자들 역시 노동자들 가운데 뽑혔다. 또한,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서도 노동은 하느님 나라를 가꾸는 일로 묘사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등에서 우리의 노동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앞당기는 모습으로 소개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가르치는 노동은 인간 실존을 정의하는 풍요로운 개념임에도, 우리는 잘못된 노동 현실 때문에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들,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빈곤층, 장시간의 노동과 정당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휴식권 등의 문제로 많은 이들이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말씀하신 것과 멀리 떨어진 우리 이웃의 아픔인 것이다.

앞으로 10번에 걸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와 가톨릭평화신문이 공동 기획한 특별 연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를 살펴보자 한다. 복음의 가르침과 사회교리 원칙에 따라 구조적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시간을 통해, 구체적 실천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왜곡된 노동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거두고,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새길 수 있는 장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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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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