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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4) 클뤼니 수도원

수도생활 영성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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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링거 왕조의 수도원 쇄신운동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던 아니아네의 베네딕도(756~821)에 의해 시작됐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죽자 곧바로 중단됐다. 그러나 그가 추진했던 쇄신 운동은 10세기 거대한 베네딕도 수도원이었던 클뤼니 수도원에 의해서 다시 부활했다. 클뤼니 수도원은 특별히 베네딕도 규칙서의 엄격한 준수와 순명, 엄격한 금욕, 전례를 강조하면서 규모가 큰 수도원 제국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 당시 클뤼니 수도자들은 문학이나 영성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교회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사실 클뤼니 수도원은 초기에 성덕과 분별력이 뛰어난 위대한 아빠스들의 지도 아래에 있었기에, 약 200년간 교회 개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특히 성 오도 아빠스는 수도자의 생활은 전례나 렉시오 디비나에 의해 활력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뤼니 수도원에서도 이렇게 렉시오 디비나를 인정하긴 했지만, 옛날 수도자들이 강조했던 것보다는 그 중요성이 많이 줄었다. 더욱이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은 더욱더 많아져 성경주석서, 신학서적, 교부들의 문헌뿐만 아니라 심지어 백과사전도 포함됐다. 고대의 수도자들에게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대상이 계속 확대됐다. 심지어 영성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백과사전도 포함됐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특별히 클뤼니는 육체노동을 소홀히 하고 전례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수도생활의 세 축인 기도, 일, 그리고 렉시오 디비나의 균형을 잃게 됐다. 그들은 너무 제도화된 생활과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측면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로 인해서 아이러니하게도 10세기에 교회 쇄신의 상징이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불과 한 세기 후인 11세기 말에는 오히려 부의 상징이 되어 교회 쇄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1세기와 12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수도승 전통 안에서는 다시 본래의 수도생활로 되돌아가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되어 새로운 수도회들이 계속 탄생했다. 그 대표적인 수도회들이 가말돌리회, 카르투시오회, 시토회다. 이들 모두는 클뤼니 수도원이 잃어버린 수도원의 영성을 회복하려 시도했고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토회의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경에 대한 연구보다는 오히려 그 말씀 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함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를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어 확실한 안내자로 보았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를 하느님과의 정감적인 일치를 일으키고 관상을 준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행이라고 보았다. 카르투시오회의 원장이었던 귀고 2세는 수도자들이 지상에서 하느님과의 높은 일치를 향해 올라가야 할 영적 사다리로써 렉시오 디비나의 네 단계, 즉 독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와 관상을 아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이렇듯 수도 전통에서는 언제나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독서의 방법보다는 마음으로 읽고 맛들이는 단순한 렉시오 디비나 방법이 제시됐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성경을 통해 지식보다는 지혜를 더 추구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의 논리적 결과보다는 오히려 말씀의 신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였다. 중세의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영감을 렉시오 디비나로부터 받았다.





허성준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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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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