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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묵상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위한 준비

[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21. 기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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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토마스 머튼은 기도를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분과의 편안한 휴식으로써 안식과 같다고 보았다. 이는 기도의 목표인 관상의 상태에 도달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머튼에게 있어서 기도와 묵상 (Meditation)은 “자신의 존재의 심오한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신앙과 경이와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준비”였다. 다시 말해, 성독, 기도, 묵상은 관상의 은총을 받기 위한 도구요, 준비 작업으로서 최종 목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에 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다음, 이렛날에는 쉬셨던 것처럼 기도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 안에서의 쉼’이 그 목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 하느님과 함께 낙원에 머물며 아무런 부끄럼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처럼, 기도는 모든 ‘나의 것’을 멈추고,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 들어가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낙원에서의 편안한 쉼을 얻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쉬는 기쁨이요 평화로운 시간이며, 하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은총의 때이다. 의무감에서 혹은 무수한 자신의 바람을 아뢰며 기계적인 기도를 바치고 있는 우리에게 머튼은 기도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처음부터 기도에 대해 이렇게 이해를 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머튼 역시 우리와 같이 처음에는 기도는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 「칠층산」에서 머튼은 자신이 처음 기도한 때는 1933년 로마 성지 순례 중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비잔틴 모자이크를 바라보며 영적인 체험을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 궁금해졌으며, 신약성경을 사서 읽었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체험 후, 처음으로 기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기도, 곧, 입술과 지성과 상상뿐이 아니고 생명과 존재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어둠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오시어 나의 의지를 속박하고 있는 이 많은 무서운 것들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칠층산」 p247-248)

그러나 머튼이 이렇게 처음으로 기도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예전보다 더 방탕해졌고 더 타락했다. 아직 그에게 기도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머튼의 기도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모습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귀감이 됨을 보여 준다. 그가 내면에서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라는 음성을 듣고 처음으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성체 성령 성당에 갔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은 열대여섯 살가량 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진시하고 조용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성당에 가는 진정한 목적은 기도를 바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다른 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통한 감동과 변화는 하바나(쿠바의 도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도 일어났다. 미사 중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쿠바 어린이들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는 “내가 하느님의 현존을 목격하여 갑자기 그 눈 부신 빛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며, 마치 천국이 내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이는 우리가 조용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다른 이들을 기도로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천국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머튼 자신의 기도 진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바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 중에 내가 이 빛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 사정을 분명하게 이해했거나 기도에 매우 진보했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내 기도는 대체로 염경기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칠층산」 p585)

다른 이가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감흥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 기도의 깊은 영적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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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1-2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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