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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2. 관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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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머튼의 많은 저서 가운데 ‘관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새 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이다. 이 책은 1장에서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2장에서는 ‘관상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이들은 그 내용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공감할 것이다. 이유는 무엇보다 관상은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머튼의 다른 책들과 함께 관상에 대해 접근하다 보면, “관상은 우리가 모두 도달해야 할 삶 자체”임을 깨닫게 된다.

이 글을 읽은 사람 가운데 “저는 결코 낙원에서 하느님을 뵙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이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을 뵙고 그분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희망한다. 아담이 있었던 인간 본래의 자리인 낙원에서 하느님과의 참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머튼이 말하는 관상이다. 머튼은 관상을 우리 안에 감추어진 신비로운 창조 사업을 자비로이 완성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았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휴식과 안식

“관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관상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창조의 목적에 다다른 모든 사람은 다 천국에서 관상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많은 사람이 아직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이런 초자연적 영역으로 들어가 새로운 환경을 맛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새 명상의 씨」, 244)

머튼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목적, 창조의 완성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다고 하셨는데, 창조의 완성은 바로 이 ‘안식’에 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휴식과 안식은 바로 우리 인간 창조의 최종 목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르게 표현하자면 천국이요,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창조의 목적에 다다른 모든 사람은 다 천국에서 관상가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천국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하였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면서, “우리 가운데 이미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당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 하느님 나라를 성취해 주셨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 나라요, 천국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천국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 본래 자리인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관상은 바로 ‘인간 본래의 삶의 회복’, ‘낙원에서의 삶의 회복’이라고 머튼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Nothingness) 속에서 하느님 앞에 홀로 설 때 나타나는 불안의 한가운데서 벌거벗은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무런 이론 체계도 없이, 철저하게 그분의 섭리에 의탁해야 하며, 그분의 은총과 자비와 신앙의 빛을 간절히 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관상은 심리학적 기교가 아니라 신학적인 은총이기 때문이다.”(「마음의 기도」, 131)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벌거벗은 채로 하느님 앞에 있었지만, 아무런 부끄럼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후 부끄러움을 알고 하느님을 피해 숨어버렸다.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은 채로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담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낙원을 회복시켜 주셨다. 머튼은 예수님의 그 벌거벗음에 하나 되는 것, 그것을 바로 관상이라고 보았다.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채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열어 보여드려도 더 이상 아무런 부끄러움이 필요 없는 인간 본래의 자리인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관상이라고 묘사한다.

1963년 머튼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에게 있어 관상적 삶이란 진리와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올바른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The Road of Joy」, 89)



부끄러운 자신 있는 그대로 보여드려야

하느님과 함께 낙원에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 본래의 자리이다. 그리고 관상은 그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사랑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숨어버릴 때가 많다. 부끄러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릴 용기가 부족하거나,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벌거벗기신 채 십자가에 매달리셨듯이 우리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그분께 맡겨드리고 그분의 낙원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자. 이 낙원에서의 삶의 회복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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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1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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