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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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11)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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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청을 몇 숟가락 꺼내 담은 그릇은 바로 양은 세숫대야였다. 어릴 때 보고 거의 보지 못했던 양은 세숫대야를 거기서 마주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세안용으로 사용했던 세숫대야에 유자청을 물과 함께 몇 술 퍼 담으신 후 그것을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앉히셨다. 나는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지만, 할머니는 개의치 않은 듯 열심히 세숫대야에 한 사발 유자청을 끓여 나에게 건네주셨다. 이미 밖에서 봉사자들이 다시 들어와 할머니를 제지했지만 완강한 할머니의 태도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순간 상한 유자청을 세숫대야에 끓여서 대접한 할머니의 정성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몇 초를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한 컵을 덜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까짓 곰팡이 핀 유자청이면 어때? 끓였는데 별일 뭐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그때는 할머니의 정성을 매정하게 뿌리친다는 것이 차라리 먹고 탈 나는 것보다 더 두렵고 힘든 일처럼 느껴졌었다.

한 컵을 어렵게 다 마시고 난 후 나는 이만 일어나겠다고 다시 갈 길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다시 할머니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끓여놓은 차를 다 마시고 가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고 보니 나로서도 더는 할머니의 뜻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다음 신자 가정을 방문하여야 하는 나로서는 할머니의 청을 더 이상 들어드릴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집이 여간 센 분이 아니셨다. 끓여놓은 차를 다 마시지 않으면 못 나간다며 큰 대자로 문 앞을 다시 가로막고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이쯤 되고 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처음부터 완강한 태도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거절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뒤늦은 상태였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마음을 내면 되지 하고 끓여놓은 세숫대야의 차를 다 마시고 난 후 할머니의 깊은 감사 인사를 받으며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주임 신부님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야단을 맞았다. 사제가 한 사람의 청을 과감히 거절하지 못하면 그 결과가 다른 신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잊히지 않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주셨다. 실제로 그 날 나는 설사를 하며 속이 불편한 나머지 오후 일정을 최소한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처신으로 다른 신자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일찍 가정 방문을 마치게 되어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 날의 체험을 잊지 못하며 지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른 신자들에게는 일찍 가정 방문을 끝내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적어도 그 할머니에게는 생애에 가장 큰 대접을 사제에게 베풀 수 있는 기쁨을 전해드렸다는 점에서 나름의 기쁨과 의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은 기능과 효율을 강조하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수익을 올려야 하고, 같은 조건에서도 최상의 판단을 합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세상을 제4차 산업혁명 시대로 빠르게 이전시키고 있다. 이에 인간의 능력과 판단을 대신하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대신하게 될 가능성이 점차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도 ‘인간의 비합리성’이 자리하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충분하다. 상대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마음은 겉으로는 비합리적일 수 있지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치유의 원천이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사랑의 바보’로 살아가는 많은 분이 계시기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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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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