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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초문화적 성숙을 통한 마지막 통합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8. 초문화적 성숙과 영적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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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지금까지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와 그의 공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머튼의 관상을 통한 최종적인 목표인 ‘초문화적 성숙’과 ‘영적 가족’에 대해 알아보고, 관상을 위한 우리 삶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온 인류 ‘영적 가족’ 가능성 확인


1965년에 기록된 「마지막 통합: 수도승적 테라피’를 향하여」라는 소고에서, 머튼은 관상에 대한 마지막 통합을 ‘보편화된 수준에서 초문화적 성숙’의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관상 안에서 그리고 관상을 통하여, 그는 종교적 문화적 경계들에 의해 구별된 인류가 ‘영적 가족’이 될 가능성을 보았다.

그가 말년에 쓴 글들은 동양의 관상가들과의 대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아시아 여정 동안 그는 ‘관상적 대화’와 ‘수도승 간의 친교’는 세상의 ‘영적 가족’을 형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안하였다.

머튼은 모든 사람을 진정한 사랑을 통한 보편적인 친교로 초대하였으며, 사랑은 관상에 의해 깨어난 모든 사람의 내적 존재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른 어디에도 없는 사랑 바로 그 자체 안에서’ 관상가들은 그들 자신과 세상, 그리고 궁극적 실재를 찾을 수 있으며, 서로가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관상은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 안에서 모든 것에 대한 문제”이며, “배타주의적이고 ‘순수함’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사랑의 같은 바탕을 찾을 수 있는 전체, 온 마음을 다함, 일치에 관한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종교ㆍ문화적 맥락 안에서 충만한 관상적 깨어남의 성숙을 이루었을 때, 진정한 우주적 의식이 다른 이들에 대한 열림과 영적 자유의 형태로 그에게 나타남을 깨닫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그는 관상에 있어 마지막 통합은 하나의 특정 종교에서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수준의 초문화적 혹은 초종교적 성숙의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깨달음은 앞으로 다루게 될 머튼의 종교 간 대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왜 머튼이 종교 간 대화에 임하는 이들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종교에서 오랜 수행을 하였거나 영적인 성숙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된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관상


지금까지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관상에 대해 명심해야 할 몇 가지 당부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모두 관상가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관상가가 되어야 한다. 관상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머튼은 관상의 깊은 체험을 통해 관상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둘째, 실제로 관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 관상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관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없애 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관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관상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상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관상은 빗대어 말하거나 암시하거나 멀리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관상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관상적 수행은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일깨우려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다.

넷째, 기도와 관상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열매가 없는 관상은 결국 울리는 징에 불과하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관상가는 확실히 초연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혹은 자기 자신 안에서든 인간의 참된 가치에 대해 스스로 무감각해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관상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썩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영성 생활에 지름길은 없어

다섯째, 관상에서 어떤 방법이나 체계 같은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마음가짐을 하느님 현존 아래에 두고 전체를 관망하고 신앙, 개방성, 배려, 신뢰, 기쁨 등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여섯째, 관상에서의 느낌을 쫓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느낌을 자각해야 한다.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머튼은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서 관상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힘들고 이렇다 할 결실이 없는 관상이 사실은 쉽고, 행복하고, 깨달음을 얻고, 뚜렷하게 큰 성과가 없는 명상보다 월등히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일곱 번째, 관상의 삶은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삶이다. 여덟째, 관상의 삶은 완성이 없다. 우리는 전 생애 걸쳐 항상 초보자다. “영성 생활에는 요령도, 지름길도 없다는 것이 유일한 난점이다. 특별한 묘책을 찾아낼 수 있고, 이것을 자신들을 위하여 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원의와 은총을 모르는 자들이다…. 사실 자기가 처음부터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무엇을 아는 데 이르지 못할 것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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