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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2)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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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나 권한이 없음을 의미하기 이전에 우리가 남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떤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일어난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상황과 배경이란 인간의 기질, 성격, 동기, 욕구, 의지, 그리고 가치관 등과 같은 심리 내적 요인들과 어디서 태어나 어떤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삶의 경험을 공유해 왔는지에 대한 사회문화적 요인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상황과 배경을 모두 이해한 후에 어떤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통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터널비전)으로 타인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온전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최소한의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판단을 통한 죄를 최소화할 수 있다. 게다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내리는 인간의 겸손한 판단은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를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삶을 사는 분들이 있다. 바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 소명인 판사들이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가장 존경하는 판사로 고(故) 김홍섭(바오로, 1915~1965) 판사를 꼽았다. 평생 사랑과 청빈의 삶을 살았고 특히 사형수와 수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사도법관(師徒法官)’으로 불리는 분이다.

김 판사는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끔찍한 사건의 피고인을 앞에 놓고 자식에게 타이르듯 온갖 정성을 다해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선고하는 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하고 형을 선고하였다.

김 판사는 선고를 내린 후 며칠 지난 다음 교도소로 이들을 찾아가 직책상 달리할 수 없어 판결을 내렸지만, 심히 미안한 일이라며 양해를 빌고 나서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권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김홍섭 판사는 판사로서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직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법리와 증거를 통해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도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누가 죄인인지를 알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고 있었다. 게다가 직책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면서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고인들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만 판단하지 않고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김 판사의 마음을 통해 회심을 결심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인간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할 수 있다. 인간의 겸손한 판단이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사법권 남용의 오명을 쓰고 사법부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요즘에도 김홍섭 판사와 같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는 법관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계속>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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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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