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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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 하루치 양식이 뭐길래

[엉클죠의 바티칸 산책] (2)“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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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청하는 ‘일용할 양식’은 어느 정도면 충분할까? 한 노파가 따뜻한 수프와 갓 구운 빵으로 차린 저녁 식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바치고 있다. 니콜라스 마스의 ‘기도하는 노파’(1656년경, 캔버스에 유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익스박물관)



“우리, 날마다 하느님께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 기도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비는데, 그게 말이 되나. 요새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니라 몇 년 치 양식을 쌓아놓고 있으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니….”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항상 이 대목이 걸립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암송할 때 ‘일용할 양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일용할 양식(daily bread), 쉽게 말해 하루 치 양식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하루 치 양식을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 아니면 늙어 죽을 때까지 먹을 평생 양식이나 자자손손이 먹을 양식을 달라고 하는가? 후자라면 매일 기도할 때마다 위선을 떨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하느님께 이렇게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때 나 자신을 약삭빠르게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하루 치 양식의 현대적 의미가 예수님 시대와 다르겠지 하는 얕은 생각입니다. 저만 이럴까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2000년 전 갈릴래아로 되돌아가 봐야 합니다. 그때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탈출기 속의 주님을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당시 갈릴래아 백성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 치 양식을 주시며 살게 했던 것처럼 저희에게도 하루 치 양식을 주시옵소서!” 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양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풀이 듬성듬성, 모래바람은 쌩쌩, 황량한 벌판입니다. 40년 광야 살이! 지금 생각해 봐도 끔찍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식솔은 오죽 많았겠습니까.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성경에는 장정만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전체 인원은 줄잡아 200만 명 이상이었겠지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200명이면 어떻고, 2000명이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지가 중요하지요.

시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없이 주님에게 매달려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주님은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준 다음 저마다 먹을 만큼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탈출 16,16 참조) 매일 하루 치 양식만 준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나 욕심꾸러기가 있고, 청개구리가 있습니다. 하루 치 이상의 양식을 가져가는 사람이 그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다음날 새벽이 되면 남은 음식에 구더기가 생겨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치 양식! 얼마나 공평한 조치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살이는 노예 습성을 털어버리려는 몸부림이었고, 하느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수백 년간 노예로 살았습니다. 영혼이 없는 동물적인 삶이었지요. 주님을 섬길 생각도 없었고, 동족 간의 형제애도 없었고, 독립심이나 자유의지도 없었습니다. 40년 동안의 하루 치 양식은 신묘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한솥밥 효과입니다. 주님이 주는 밥을 40년 동안이나 받아먹었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거룩한 일치입니다. 첫째는 하느님과의 일치이고, 둘째는 백성들 간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강한 공동체 정신과 끈끈한 형제애가 싹텄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주는 메시지

주님은 하루 치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주었지, 특정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에서 ‘저희’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우리 가족? 우리 본당 신자들? 우리 동네 사람들? 우리나라 국민들? 아니면 인류 전체? 일용할 양식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정지시켜 버렸습니다. 바티칸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티칸 광장의 노숙자들은 뭘 먹고 사나?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은 있나? 바티칸에서 목요일 저녁마다 음식 봉사를 하는 한국의 꽃동네 수녀님이 걱정되어 전화했습니다. “우리마저 떠나면 이들은 뭘 먹고 살겠어요? 밥 한 끼 드리는 건데…. 자원봉사자들은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하루 치 양식의 의미를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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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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